나는 오너 드라이버다.

교통체증도 끔찍하고 밀린 일도 많고해서 요즈음은 아예 밤9시반
이후에 학교를 나선다.

그런대로 소통이 잘되는 길을 달리면서도 항상 조마조마하다.

노면상태가 안좋은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끔은 차가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게 용하다고 느낄만큼 쿵쿵 튄다.

이것이 어디 산골 벽촌의 이야기도 아니고 서울하고도 도심 대로의
현주소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마무리작업을 제대로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 무엇을 상실했기에 눈에 안띄는 작은 부분에 정성을
다하는 책임의식이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렇게 오랫동안 효를 강조하며 교육하여 왔건만 소외감을 못이겨
자살하는 어버이가 속출하는가 하면 유흥비 마련을 위해 부모를
다치게 하는 자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현실,근로의 존귀함을
논하여 왔건만 근로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자기 소임을
다하는데서 오는 희열이나 보람과 같은 정신적측면은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사회,책임부재의 현실을 탓하나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않는 사회,통일 통일하지만 국민적 컨센서스를 유도할만한 비전이나
철학은 논의조차 되지않는 현황,어찌보면 우리 사회는 온통 일시적인
자기선전과 성과과시를 위한 무대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것은 선임자의 일을 승계하여 정리하고,후임자에게는 좀더
발전적인 단계에서 일할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도록 맡은바 소임을
다하려는 책임감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뚜렷한 철학에 입각한 가치관을 정립시키지 못한 교육의
책임일 것이다.

교육은 정확한 현실인식능력과 유연한 대처능력의 함양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논리를 소화하고 융화시키기 위한
나름대로의 가치관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자 하는 내적 핵의 정립말이다.

내적 핵(양심이라 해도 좋다)은 클 필요도,요란할 필요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핵이 작으면 작을수록 가변적인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할수 있고 도그마티즘에 함몰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그 핵은 작되 어떤 상황에서도 깨지거나 꺾이지 않을만큼
단단해야 한다.

니토베 이나조(신도호도조)라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교육자는 이
핵을 자주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주란 자기 마음을 다스릴수 있는 자기 마음의 진정한 주인을 의미한다.

자주적 인간이란 결국 자기가 옳다고 믿는바를 따르는 인간이라는
이야기이다.

책임부재가 논란이 되는 상황은 역으로 말해 주체적 선택의 부재를
의미하고,자신을 지탱하는 내적 핵.철학의 부재에 통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는 일본이 근대국가의 막을 연 명치초기에
이미 교육을 통한 국민의식 개혁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지만 그 민심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지 않으면 후일을
도모할수 없다는 그의 논리는 유형의 선진화에 급급하다가 정신적
황폐함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타당하게 들린다.

우리의 교육은 그간 너무 근본을 도외시한 채 표면적인 이상론에
치우쳐 온것이 아닐까.

교육방향을 설정함에 있어 근본부터 생각하고 일관된 기준에 의해
판단할수 있는,그래서 자신이 납득할수 있는 것을 취사선택하는
능력의 함양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책임부재의 고통을 좀더 오래
겪게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새해에는 역사의식이 뚜렷한 자주적 인간이 되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