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연구개발(R&D)분야에 혁명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상R&D(Virtual R&D)''라는 신조류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상R&D란 어떤 기업이 모든 신기술이나 신제품에 대한 연구개발을 외부
연구소나 기관에 완전히 일임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까지는 가상R&D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를 향한 업계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이 늘고 있어 가상R&D란 말이 보편화될 날도 그리
멀지 않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연구개발형태가 21세기에는 뿌리를 내릴 것으로
전망한다.

영국 PA컨설팅사의 기업R&D전문가인 스티브 본씨는 "가상R&D를 향한 물결은
지금 전세계에서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글로벌트렌드"라고
단언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한 통계도 이 새로운 물결의 전개를 뒷받침해
준다.

OECD의 기초과학기술통계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선진국기업들의 기업자체
R&D에 대한 외부위탁R&D비율이 해마다 2~3%씩 증가했다.

기업들이 신기술에 대한 외부의존도를 앞으로 더 늘리겠다는 방침이어서
가상R&D가 되돌릴수 없는 물결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PA컨설팅과 미MIT대가 최근 공동으로 조사한 "업계의 R&D외부위탁계획"은
가상R&D가 글로벌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일본기업들은 지난 93년에 40%였던 외부기술의존도를 96년에는
60%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미국기업들은 이기간중 이 의존도를 12%에서 35%로,유럽기업들은 약 20%
에서 24%로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구미에 비해 상대적으로 폐쇄성이 강한 일본기업들의 외부기술의존도가
높은것은 다소 뜻밖이다.

폐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기업들이 가상R&D를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가상R&D를 이끄는 기업의 연구개발외부위탁은 최근의 갑작스런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추세는 내용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에는 기업내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부에 연구개발을 위탁했다.

연구개발 경비를 줄임과 동시에 기업내에 없는 인력을 외부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경향은 기업내부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컨설턴트 소장겸 연구기술기구협회장인 폴 오튼박사는
"기업의 과부하를 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전략적 시각에서
R&D의 외부위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로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가상R&D의
특징을 짚는다.

외부의 대학이나 독립연구소에 R&D를 위탁하는 R&D외부조달은 컴퓨터산업
에서 가장 활발하다.

심지어 경쟁업체들끼리도 힘을 모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R&D동맹을
맺고 있을 정도다.

막대한 개발비용에 대응하고 서로다른 수많은 기술에 처지지 않고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R&D의 외부위탁이 가장 저조해 가상R&D 가까이로 가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화학및 제약산업이다.

이들 산업의 핵심기술중 대부분이 생산공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서다.

더구나 생산공정을 외부에서 조달하기가 어려운 탓에 제약및 화학업계의
가상R&D속도는 늦다.

그러나 이들 산업도 최대한 R&D의 외부위탁을 점차 늘려갈 계획으로 있다.

특히 화학업계는 앞으로 오는 2000년까지 5년간 외부위탁을 지금보다 50%
늘릴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산업별로 가상R&D를 향한 발걸음이 완급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업계가 기본적으로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R&D의 외부조달확대는 거스를수 없는 대세라는 지적이다.

< 이정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