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처리될 때 취재기자로 현장을 지켜봤다. 1987년 민주화 단초를 마련해놓고, 정치는 아직 왜 이 모양이냐는 허탈함이 들었다. 그런데 권위주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계엄령에 이어 대통령 탄핵안이 또 국회를 통과했다. 20년 새 세 번, 우리 정치 체제의 빈약성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지난 두 번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진영 갈등의 골은 치유 불능 수준으로 치달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사회 갈등 사안 중 92.3%가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봤고,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답은 58.2%에 이르렀다. 이번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이런 현상이 더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이 모든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이라며 권력 구조 개편 목소리가 나온다. 87체제 이후에도 대부분의 대통령 말로가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도 과도한 대통령 권력에 따른 결과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정치 제도가 변화된 사회, 발전된 경제 수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개선하는 게 당연하다. 의회 권력도 문제다. 여소야대일 땐 만성적 입법 교착, 거대 야당에 의한 행정부와 사법부 통제는 삼권분립을 위태롭게 한다. 세 번의 대통령 탄핵안 통과가 모두 여소야대 정국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의회 권력의 폭압적 단면을 보여준다.그렇다고 제도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를 한다고 제왕적 대통령 문제가 해결되고 정치가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 근본은 후진적 정치 문화와 풍토, 리더십이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연말이면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많은 ‘밍글링(mingling)’이 열린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뜻의 밍글링은 실리콘밸리 특유의 수평적 기업 문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행사다. 이곳에선 최고경영자(CEO) 등 이른바 ‘C레벨’의 주요 경영진이 기자 및 애널리스트를 초청해 술, 음료 및 핑거푸드를 즐기며 격의 없이 어울린다. 스포츠 같은 가벼운 대화가 오가기도 하지만, 곳곳에선 송곳 같은 질문과 솔직한 대답이 오가기도 한다. CEO가 자사 콘퍼런스콜에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국에선 쉽사리 보기 힘든 광경이다.쏟아진 韓 계엄·탄핵에 대한 질문지난 며칠간 연이어 열린 밍글링에 대한 기대는 컸다. 빅테크 CEO들과 짧게나마 지근거리에서 대화할 드문 기회여서다. 친분을 쌓고 향후 인터뷰할 기회가 마련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야심 찬 기대는 번번이 예상을 빗나갔다. 질문할 틈도 없이 한국의 비상계엄과 탄핵에 대한 질문이 역으로 쏟아져서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한국의 정치 상황에 취재하러 갔다가 취재당하고 돌아오기 부지기수였다.한 기업 CEO에게 한국 특파원이라는 소개를 건네자 “엄청난 혼돈의 나라에서 왔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 비상계엄 뉴스를 봤을 때 정말 두 ‘코리아’ 중 ‘사우스 코리아’를 말하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는 다른 기업 CEO의 말에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한 외신 기자가 “한국은 내가 아는 나라 가운데 가장 혁신적인 나라 중 하나인데, 다른 한쪽에서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하는 모습이 펼쳐진다는 게 충격적이었다”고 말하자 임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이들의 관심은
“대한민국 시장경제 시스템과 정부의 역량을 믿습니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된 바로 다음 날인 지난 15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장경제 시스템은 튼튼하고 정부는 유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야권의 유력 대권 주자답게 국가 리더십 공백기에 경제뿐만 아니라 외교안보, 국방 등 모든 영역에서 국민적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한 발언이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치적 의도가 어떻든 간에 대권을 노리는 제1야당 대표의 격에 맞는 메시지”라는 평가가 나왔다.반면 이 대표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대표가 “유능하다”고 치켜세운 정부 관료의 우려를 외면하고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법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다. 이런 법안은 대체로 이 대표가 “튼튼하다”고 얘기한 시장경제 시스템을 정면으로 역행하는 반시장적 내용을 담고 있다. 국회 경제 관련 상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은행권 횡재세 도입,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한 국토보유세 부과 등 시장 원리를 그 누구보다 강하게 부정해온 게 바로 이 대표 아니냐”고 했다.특히 이 대표가 강조한 시장경제 원리를 무시한 대표적 법안이 민주당이 당론으로 추진하는 ‘양곡관리법(양곡법) 개정안’ ‘농수산물유통 및 가격안정법(농안법) 개정안’이라는 지적이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값이 일정 가격 아래로 떨어지면 정부가 차액을 지급하고, 초과 생산량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농안법 개정안은 농산물 가격이 기준가격 밑으로 떨어지면 생산자에게 차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