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쯤전에 한 여성잡지사에서 전화가 왔다.

컴퓨터통신에 릴레이 소설코너를 운영하는데 소설의 첫부분을 시작해
달라는 청탁이었다.

릴레이소설이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자기 취향대로
상황을 이어 나가고, 또 뒷부분을 그와 관계없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순발력 또는 참여자들의 재치로 만들어지는 일종의 지적 게임인
셈이었다.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객적은 일이지만 길지않은 서두를 써내려 가면서 나는
사실 꽤 즐거웠었다.

X세대, 물질 향락주의에 빠진 오렌지 집단들이 아닌,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만지며 자기개성과 창의력을 갖추고 당당히 살아가는 진정한 새 세대들,
그들의 발랄한 감각과 자유로운 사고들을 엿볼수 있으리라는 기대때문
이었다.

나는 한 영화사의 면접 시험장을 상정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보다 더 훌륭한 시설, 스필버그보다 더 트인 멋쟁이
감독, 후한 보수, 자유로움을 보장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판을 펼칠까.

"당신만의 시나리오, 새로운 광고 아이디어, 절묘한 연기, 당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십시오"

광고를 보고 모여든 젊은이들이 면접순서를 기다리는 부분에서 나는
첫번째 주자에게 펜을 넘겼다.

이야기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나는 중간에서 아무런 손을 쓸수가 없었다.

파티장처럼 꾸며놓은 면접장에 첫번째 주자가 등장시킨 사람은 미녀로
위장한 테러리스트였다.

풍만한 가슴을 제치고 두손에 꺼내든 것은 총과 수류탄이었다.

파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그는 일당들과 함께 영화사를 점령해
버렸다.

두번째 주자는 테러리스트들이 영화를 찍는 장면을 보여준다.

"너희들 모두가 배우다. 그러나 대사는 없다. 쫓겨 다녀라"

그리고 그들은 실탄을 쏘아댄다.

피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모습을 차곡차곡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세번째 주자는 민완경찰 한 명을 등장시킨다.(웬 다이 하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여자를 애타게 찾는 한편으로 경찰을 부른다.

네번째 마지막 주자는 살인마들의 말로를 그린다.

민완경찰이 사모하던 여자는 알고보니 이 영화사측에 원한이 있는, 이번
테러의 주모자이며, 그녀의 명령을 따르던 괴한들은 교도소에 갇힌 자기
패거리를 위해 일질극을 벌이려는 또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끼리 총격전이 벌어지고 경찰이 사격을 가하고 여자는 결국 죽고.
끝.

한 마디로 황당했다.

숨돌릴 틈없이 몰아대는 액션 즉홍 즉발 즉사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과
피의 잔치.

참가해준 주자들을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소설을 읽은 여러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역시 그들이 기막힌 재간꾼들
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의 정서를 나타낸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로서는 좀 여유가
필요했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나는 수습하기로 했다.

그들은 X세대니까.

우리처럼 U,V,W세대가 아니니까 말이다.

요새세상의 이야기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초겨울의 쨍한 햇볕, 아파트 마당에서 떠들어대는 철부지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이러저런 생각을 했다.

떠드는 저 조무래기들, 저들 역시 Y세대가 되어 멀지않은 어느날 기성이
된 X세대의 뒷통수를 호되게 치리라는 것.

Y세대의 정서를 뒤숭숭한 심정으로 수습하면서 X세대는 그제서야, 마치
우리처럼, 창조와 파괴, 영원과 순간, 그리고 인간 삶의 기저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리라는 것.

또 한가지 어쨌든 내가 이만큼이라도 나이를 먹어 그들보다 일찍 눈을
감을수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하는 점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