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소요소에 나붙었던 포고문은 그날 하루를 제대로 넘기질 못하고 거의
전부가 찢기고 뜯겨 나갔다.

사학교 학생들의 소행이었다.

사학교 중에서도 청소년들이 다니는 유년학교의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귀갓길에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누가 보건 말건 공공연히 난동을 부리듯
갈기갈기 찢고, 북북 뜯어내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누구 한사람 나무라거나 만류하질 않았다.

간혹 관원이나 순사가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모르는 척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사족들은 학생들 참 잘한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구경을 했고, 일반
백성들은 못마땅했으나 겉으로 나타내진 않고 속으로, 그런다고 내려진
폐도령이 취소될것 같으냐고, 흥! 헹! 하고 콧방귀들을 뀌었다.

다음날은 전체 사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모두가 훈련용 총검을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학교에서 쏟아져 나와
가고시마 거리를 행진하면서,

"폐도령을 철회하라-"

"우리는 폐도령을 받아들일수 없다-"

"폐도령은 망국령이다-"

이런 구호를 외쳐댔다.

나중에는 구호가 비약하고 과격해져서,

"오쿠보를 타도하자-"

"도쿄로 진격하여 제이유신을 이룩하자-"

"난슈 도노는 결단을 내려라-"

거침없이 무력봉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학생들만 시위를 한게 아니었다.

사족들도 나섰다.

일부러 모두 대검과 와키사시(작은 칼)까지 차고 나와 학생들의 뒤를
따르며 함께 구호를 외쳐대기도 했고, 별도로 자기네끼리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시위는 하루로써 끝나질 않았다.

연일 시가지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현청에서는 방관을 하였다.

내심 잘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반정부 시위이면서도 현청으로부터는 지지를 받는 묘한 시위였다.

작은 왕국의 면모가 여실하였다.

처음 이삼일은 그저 모르는 척 묵인하고 있던 현지사 오야마는 사흘째
되는 날 오후 사이고를 찾아갔다.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하려고였다.

시위가 파괴를 수반하는 소요로 번지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사이고는 한가롭게 집앞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치 떠들썩한 가고시마 시내의 일은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듯한
그런 태도였다.

오야마는 약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난슈 도노,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집안으로 들어가자구요"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