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인문지리의 대가인 이중환은 "택리지"에 서울의 지리적 특징을
"일국산수의 정과 신이 다 모인곳"이라고 극찬해 놓았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서울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해진 것은 불가의
풍수도참설에 대한 유가지리설의 승리를 뜻한다.

만약 풍수지리설을 따랐다면 도읍으로는 지금의 계용산밑이나 서울의
신촌.연희동 일대인 모악인근이 훨씬 더 유리했다.

실제로 계룡산밑에서는 1393년3월부터 10개월간 신도건설공사가 진행된
일도 있었다.

남경의 옛 궁터를 돌아 본 이성주가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만한
곳이다.

더우기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잇수가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는 "태조실록"의 기사는 당시 태조의 생각을 읽을수 있게해
준다.

특히 1398년3월 정종이 한양으로 천도한지 4년5개월만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7년뒤인 1405년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과정을 살펴
보면 한양천도는 수구보수세력에 대한 혁신적 신진유학자들의 승리를 뜻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도덕성에 바탕을 둔 민본정치를 펴나갔던 조선의 행정수도 한양은 극히
절제된 계획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도성안의 인구는 500여년동안 20만명을 넘지 않았다.

궁궐과 관아는 검소하면서도 장중했다.

내신의 집이라도 최고 40간을 넘지 못하게했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을
막았다.

도로와 점포의 크기도 법으로 정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한양은 일본 여진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에 문물을
전해주던 선진 문화도시였으며 학문의 도시였다.

한양을 가리켜 중국의 장안 이나 낙양이라고 무른 것도 그런 든든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청계천에서 잉어가 뛰놀던 때의 이야기다.

그뒤 일재36년간 식민지수도가 됐다가 한국전쟁까지 겪은 서울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됐다.

무엇보다도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무계획적으로 재구성된 서울은 요즘 다시
그 후유증 때문에 몹시 시달리고 있다.

싫든 좋든 5백여년을 지켜온 인불도덕도 우리들에게서 깡그리 증발해
버렸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석기시대 철기시대도 되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29일은 서울로 철도한지 꼭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모두 서울정도의 참뜻을 되새겨 7천만의 얼과 꿈이 기든 도시로 "서울"을
가꿔 갔으면 한다.

"태조실록"에는 이날의 일을 이렇게 한줄로 기록해 놓았다.

"새 서울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