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인류 최대의 "축전"이 되었지만 제1회 월드컵축구대회가 1930년에
개최되었을 때만해도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7월13일 우르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프랑스~멕시코의 개막경기가
있었을때 관중수는 불과 1,000명이었다.

그러나 관중의 열기는 대단하였다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1904년에 창설된 것은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려는
유럽몇나라의 열의때문이었다고 한다.

FIFA 최초의 규약에 "국제축구연맹만이 국제선수권대회를 개최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기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선수권대회의 꿈은 당시 세계최강의 축구왕국이었던 영국이
불참하게 되어 시간을 끌게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월드컵 축구대회를 실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프랑스의
법률가 줄 리메이다.

월드컵대회를 초창기에 "줄대회"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공은 컸었다.

그는 19년에 프랑스축구협회 회장이 되었고 21년에는 국제축구연맹
제3대 회장이 되었다.

취임후 그가 주목한 것은 24년 파리올림픽에서 남미의 우르과이가 축구에서
우승한 사실과 30년이 우르과이가 독립된지 100주년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월드컵 축구대회는 우르과이 독립 10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개최하게 되므로써 가장 개최의 문제가 되었던 대회경비를 해결하게 되었다.

또 세계선수권대회를 남미에서 개최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제국은 대회참가를 주저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남미에 가려면 그주간의 항해가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리메의 분투로 겨우 유럽에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만이
참가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정애준대한축구협회장은 9일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의 국내개최의사를
공식으로 표명하는 서한을 팩시밀리를 통하여 FIFA에 보냈다.

물론 팩시밀리 한장으로 월드컵 한국대회가 결정될 일이 아니다.

현재 2002년 월드컵대회 유치를 희망하는 국가는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와 호주등이 있다.

일본은 92년에 유치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국회에서는 관련 지원법을 재정
하였으며 300억엔 규모의 유치기금을 조성하는등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월드컵 본선에 4회진출이라는 실적을 갖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대회를 남북한공동으로 개최하게 된다면 얼마나
소망스런 일인가.

정부 체육계 경제계 가릴것 없이 앞으로 전국민이 일체가 되어 월드컵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때라고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