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일어난 두차례의 석유파동을 통해 중동산유국들은 엄청난
부를 얻게 되었다.

원유값이 순식간에 몇배로 뛰니 국제수지 흑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뉴욕의 빌딩과 베벌리힐스의 저택은 하나 둘씩 산유국 토후들의
차지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멀지않아 전세계의 재산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데 80년대에 들어서면부터는 일본이 그들의 뒤를 이어 국제사회의
"큰손"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신흥부자답게 일본사람들은 몇백만달러를 내고 르누아르의 소품을
산다든가, 미국의 영화사를 인수한다든가 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중동의 산유국들과 일본이 이렇게 정신없이 사모은 재산이 과연 그나라의
국민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그들의 박물관에 인상파화가의 그림 몇점이 더 걸린다고 해서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을 필적할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 부동산가격의 폭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투자가 이득을 가져
오기는 커녕 큰손실만 안겨 주었다.

그들이 미국과 유럽에 얼마나 큰 재산을 갖고 있는지 몰라도 산유국들은
좀체로 후진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손바닥만한
집에서 살고 있다.

이를보면 그 엄청난 국제수지의 흑자를 통해 그들이 실제로 얻은 바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국제수지의 흑자는 바로 번영의 표상이고 적자는 패배의 상징이라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이 많다.

국민경제의 입장에서 볼때 적자가 나는 경우보다 흑자가 나는 쪽이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흑자 그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 많은 흑자를 내게끔 만든 일본의 정부를 무조건 칭찬하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어리석음을 비판해야 마땅하다.

국제수지의 흑자가 난다는 것은 국민들이 그만큼 허리를 졸라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생산해낸 것보다 더 적게 소비했기 때문에 흑자가 가능하기 때문
이다.

일본사람들이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것을 먹기로 했다면 국제수지의
흑자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허리를 졸라맨 결과가 로스앤젤레스의 빌딩 몇채라면 그들이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소비생활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국제수지의 적자를 기록한 나라의
국민들이 더 큰 실속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단지 무한정 적자를 기록하여 부채를 누적해 갈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할 뿐이다.

경제생활의 요체는 결국 사람들이 이를 통해 얼마나 큰 경제적 복지를
누릴수 있는가에 있다.

이와같은 평범한 진리를 무시하고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국제수지 흑자가
더 커진다고 무조건 박수를 보내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요즈음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걸핏하면 "국가경쟁력"을 들먹이는데
여기에도 그와 같은 맹목적인 측면이 있음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