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로 일하고 있던 1968년9월, 회사는 다시 뜻하지 않은 섭고를 겪었다.
당시에는 건조실이라고 해봐야 열풍기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성형된 그릇
들을 나무판자로 된 선반위에 층층이 올려놓고 드럼통에 불을 지펴 그릇을
말렸었는데 그곳 근무자가 땀에 젖은 속옷을 빨아 드럼통에 말리다가 그만
주위에 있던 인화물질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로 인해 구공장 건물은 거의 전소되어 버렸고 이에 따른 회사의
손해 또한 막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길이 잡힌뒤 나는 이런 손해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 그것은
불이 났을때 이웃주민들과 회사 종업원들이 보여줬던 높은 애사심을 피부
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무렵 나는 생산방식을 계획생산으로 바꿨다.
종래에는 거래처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그것을 토대로 그 다음달에 출고할
물량을 산정하곤 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과거 수년동안의 월별 공급통계
를 기초로 과감하게 예측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계획생산방식은 도매상의 소요량을 한달 먼저 공급하는 결과를 가져와
경영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또 판매방식도 종래 회사에서 만들어낸 모든 물건들을 위탁상인 양병진씨
에게 독점적으로 공급하던 위탁판매방식에서 도매상들에게 직접 공급하는
직접판매방식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한단계의 중간 판매과정을 없애니 공급단가가 낮아졌고 도매상들
또한 생산공장과 직접 거래한다는 위상 격상의 효과를 낳았다.
이런 도매상에 대한 직접공급방식으로의 전환은 내가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한단계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을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에 나는 수동적이던 이전의 판매전략에서 한층 더 능동적으로 대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와 관련해 창립22주년기념행사로 64년에
연 "행남자기전시회"는 이렇듯 판로개척에 나선 행남사의 첫
홍보이벤트사업이었다.
이때 한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전시회 첫날은 각료급인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하객들이 몰려와 대성황을
이뤘으나 개관식을 마친 다음날로부터 관람객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그래서 난 한가지 획기적인 광고전략을 짜냈다.
당시 전시장 한쪽에는 미니스커트에 머리에는 찜기를 뒤집어 쓰고 몸
전체에는 접시와 주발 뚜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마네킹이 하나
있었는데 그 모양은 가히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전시안내 광고문을 붙여 명동거리 한가운데
세워놓게 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마네킹 몸에 붙은 전시안내문에 따라
관람을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전시장은 발디딜 틈이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문에 안내원들은 물론 간부사원들까지 총동원되어 관람객들을
접대하느라 실로 "눈코 뜰새 없을 정도"였는데 하도 관람객이 많이
모여들자 한쪽에서는 "이제 그만 마네킹을 들여놓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행남사가 맨처음 신문광고를 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그릇의 구매자들은 중류층이상의 주부들이다,또 예비신부들의
경우 자기류는 혼례의 필수품이다"는 생각을 갖고 이화여대 대학신문에
우리 제품의 선전공고를 싣게 한 일이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