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에서 반란의 불길이 올라 현청인 사가성이 함락된 것은 정확히
말하면 그해 2월18일이었다.

그러니까 에도가 사가로 돌아온지 대략 한달만이었다.

정한론 정변으로 사이고를 비롯한 정한파 대신들과 그 계열의 관원들이
줄줄이 사표를 내던지고 관계를 떠난지 넉달 뒤였다.

그런데 사가성이 함락된 바로 이튿날인 19일에 하카다( 다:지금의
후쿠오카)에 정부군의 한 부대가 상륙했다.

사가의 반란 사족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출동한 것이었다.

그 부대는 오사카에 있는 진대(수비군 사령부)의 병사들이었고,
지휘관은 노즈 시스오 소장이었다.

수송선에서 내리는 노즈 소장의 바로 뒤를 복면을 한 사람이 하나
따르고 있었다. 다름아닌 오쿠보였다.

오쿠보는 사가로 돌아간 에도가 마침내 반란의 불길을 올렸다는
보고를 자기의 집무실에서 받았는데,양쪽 볼의 가짜 구레나룻이
버르르 떨릴 지경으로 분노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예, 방금 전신으로 통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자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지.좋아.죽고 싶으면 죽여주지"

우국당의 과격분자들이 저희 멋대로 소야조의 사가지점을 습격하여
약탈을 감행했을때 그것을 반란의 시작으로 보고 현청에서 즉각
전신으로 도쿄의 태정관에 통보를 했던 것이다.

오쿠보는 즉각 구마모토와 히로시마, 그리고 오사카의 진대에 사가로
출동하도록 조치를 취한 다음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오쿠보는 자기가 직접 현지에 가서 반란을 진압하겠다면서
그 수괴들을 붙들어 단죄하는 재판권까지 일임해 줄것을 요구했다.

사법경의 권한을 자신에게 일시적으로 위임해 달라는 것이었다.

"에도가 일으킨 사가의 반란을 신속히 진압해서 그 책임자들을
붙들어 모조리 극형에 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 희미하게 대응했다가는 만만히 여기고서 각지의
불만세력들이 너도 나도 들고일어날지 몰라요.

가고시마의 사이고까지 움직이면 일은 그야말로 걷잡을수 없이 되고
말아요"

그 말에 모두가 극구 동의를 하여 모든 권한을 오쿠보에게 일임했다.

오쿠보는 14일에 요코하마에서 군함으로 출발하여 오사카에서 노즈
소장과 합류해서 이번에는 병사들과 함께 수송선에 몸을 싣고 19일
하카다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가 복면을 하고 상륙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외부에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