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서울대교수/경제학>

얼마전까지만해도 미국이 세계 컴퓨터시장에서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나 대만같은 나라까지도 이 시장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게 되었다.

멀지않아 말레이시아나 태국이 컴퓨터의 주요 수출국으로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밖의 여러가지 첨단제품들도 지금은 소수의 선진국만이 생산하고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개발도상국에 의해 대량생산될 단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세기 세계 최고의 공업국 영국의 주요 수출품이던 면제품이 이제는
가장 낙후된 나라의 수출품이 되어 버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처럼 몇몇 나라만이 생산하여 수출하던 상품이 이내 다른 나라들에
의해서 대량생산되는 단계에 들어서는 과정이 국제무역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는 이론이 제기되어 있다.

어떤 상품이 개발초기단계에 있을때는 그것을 개발한 나라가 중요한
수출국이 되나,다른 나라들에 의해 대량생산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수출의 주역이 바뀐다는 설명이다.

마치 사람이 생애의 각단계를 거쳐 나이를 먹어가듯이 하나의 상품도
생애의 여러단계를 거친다고 보았기 때문에 제품생애주기설( product
life cycle theory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론에서 설명하는 상품의 생애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상품이 미국에서 개발되어 시장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하자.이 단계에서는 미국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당연히 수출까지 독점하게 된다.

설사 미국의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더 높더라도 이 단계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않는다.

신제품의 경우에는 가격경쟁력이라는 것이 별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독점적 지위는 오래 가지 못하고 다른 선진국들이
경쟁적으로 생산을 시작하게 된다.

이들이 계속 생산을 늘려감에 라 규모의 경제를 누리던 미국의 상대적
우위는 점차 없어져 간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미국의 수출이 격감함은 물론 제3국시장에서도
치열한 경합이 벌어진다.

제품은 점점 더 표준화되어가기 때문에 급기야는 어떤 나라의 기업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대량생산이 가능한 단계에 진입하게 된다.

이제 미국이 가졌던 종래의 우위는 사라지고 좀더 낮은 임금으로
생산이 가능한 해외의 기업들이 미국의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한 상품이 생애의 어떤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누가 그것의 수출을
담당하게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설명은 상당한 현실설명력을 갖고있다.

다만 이 이론은 공산품의 무역에 대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예를들어 왜 태국이 쌀을 수출하고 미국이 영화를 수출하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해 주는바가 없는 것이다.

이같은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해도 국제무역의 흐름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에 관해 하나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