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는 나가사키에서 하선하여 고향인 사가로 돌아갔다.

그의 출신지인 사가번은 북규슈(북구주) 일대였다.

지금은 현으로 개편되었지만 말이다.

만약 정한파가 승리하여 실제로 조선국 정벌을 위한 출병이 감행됐을 경우
조선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가의 사족들이 무더기로 재무장해서
제일진으로 출정할 판이었다.

군수물자도 자연히 그곳을 거치게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그곳이 흥청거리고, 경기가 좋아질수
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곳에 정한당이라는 이름의 집단이 형성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다른 어느 고장의 사족들보다도 월등히 열렬하게 정한론을 지지하고,
실행에 옮기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기울어져가는 자기네 생활과 지위를 돌이킬수 있을 것 같기 때문
이었다.

에도가 귀향을 하자, 당수로 취임해달라는 교섭을 했던 터이라 정한당
사람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고향의 대선배이며, 지금은 비록 관복을 벗고 재야인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정계의 거물인 그를 당수로 모시게 되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비단 정한당 사람들뿐 아니라, 우국당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환영 일색
이었다.

이제 우리 고장의 사족들이 살판났다고 야단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살판"이란 곧 무력봉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실은 "죽을
판"인 것이었다.

에도가 사가에 도착한 당장 그날밤에 양당 합동으로 요정에서 성대한
환영연이 베풀어졌다.

두 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우국당의 당수는 시마 요시다케였다.

그는 문진전쟁 때 동정군의 대총독부 군감으로 동북지방 정벌에 공을 세워
유신정부에서 개척사판관이 되었다가 아키다 현령으로 옮겨 있었는데, 두해
전에 그만두고 사가로 돌아와 우국당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53세로, 에도보다 열세살이나 위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도 환영연에 참석했는데, 술들을 마시기 전에 일장의
환영사를 늘어놓았다.

언변에 능한 그의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고,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에도의 환영사는 자연히 현정권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
이다.

끝대목에서 시마는 꽤나 열기를 띤 목소리로,

"드디어 우리가 기다렸던 때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뜻과 힘을
더욱 굳게 한데 모아 일어설 준비를 서두릅시다. 에도 신페이 도노를 중심
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외치다시피 했다.

환영사가 궐기사인 셈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