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원하는가,아니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자본주의에도 투기가 판치고 부정과 특혜가 난무하고 졸부들의 과소비가
극성을 부리는 소위 천민자본주의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근면과
정직의 덕이 넘치고 경제적 풍요와 공정이 물처럼 흐르는 건강한 시민
자본주의가 있듯이 민주주의에도 본래 두가지 종류의 민주주의가 있다.

하나는 멸사봉공형 민주주의, 즉 공익을 위하여 사익을 자제하는 민주주의
가치민주주의가 있고 다른 하나는 멸공봉사형 민주주의, 즉 공익을 희생
시키면서도 사익만을 챙기는 민주주의 이익민주주의가 있다.

멸사봉공형 민주주의에서는 공익내지 공동선은 사익내지 개체선과는 질적
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공익이 무엇인지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국민 모두가 사색과 토론을
통하여 찾아내야 하고, 그렇게 하여 찾아낸 공동선과 공익이 지배하는
질서가 민주주의라고 믿는다.

이 사색과 토론과정에서 가능한한 사익을 앞세우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란 이익과 편의가 지배하는 질서가 아니고 가치나 원칙이
지배하는 질서, 즉 법치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반면 멸공봉사형 민주주의는 공익은 사익의 합계이고, 공동선은 개체선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사익의 억제가 아니라 사익의 표출이 선이 된다.

결국 여러 집단들간의 이익의 주장, 힘겨루기와 타협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가치와 원칙의 지배라기 보다는 이익집단들간의 일시적
타협이 지배하는 질서이고, 결국 민주주의는 법치로서가 아니라 이익집단의
자유방임주의로 이해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우리나라의 문민화는 요즈음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가치민주주의 법치주의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이익민주주의 이익집단의
자유방임주의로 가고 있는가.

멸사봉공형 민주화인가, 아니면 멸공봉사형 민주화인가.

사실 우리는 오랜 기간 권위주의적 정부아래 반독재 민주화만을 외치며
살아 왔지 권위주의적 질서가 물러간뒤 과연 이 땅에 어떠한 민주주의를
세울 것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아직 확고한 사회적 공론이 없다.

각자는 자기 편한 대로 민주화를 이해하고 각자의 이익주장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에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 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이
멸공봉사형 민주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가치지향의 정치, 정책정치가 아니라 이익지향의 패거리
정치, 구호정치가 된지는 이미 오래이나 그래도 문민정부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역시 달라진 것은 없다.

지금은 대단히 시끄러운 지방행정구역 개편문제, 예컨대 울산시의 직할시
승격문제 하나만 보아도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지방의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어떠한 내용의 민주주의인지를 잘 알수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나의 이익과 내 지역의 이익만을 앞세우지 공동의 가치와
국가전체의 이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집단이익간의 힘겨루기이고 계파간의 힘겨루기이지 공동선을 찾기 위한
사색과 토론, 그리고 지도자적 고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방향으로의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는 것이 주민의 편의, 행정의
효율, 산업의 발달, 지역간 형평성제고 등에 보다 기여하는 것이 되는가에
대한 이론과 원칙에 대한 논의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선 당장 누구에게 유리하고 어느 편에 불리한가만이 논란되고 있다.

한마디로 모두가 멸공봉사형 민주화의 기수들이다.

지도자들이 저러하니 우리 국민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주민들도 들고 일어나는것 같다.

지역노조가 파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고, 지역의 지방의회의원들과
일부주민들이 서울까지 와서 농성을 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노조가 행정구역개편에 왜 나오는가.

주민농성으로 행정구역개편 내용이 달라진다면 그러한 나라는 문 내려야
할 나라이다.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다.

법치도, 공동의 가치도 없다.

집단이익들간의 자유방임적 무한경쟁만이 기승을 부린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그렇게 기다렸던 민주화이고 문민화인가.

어떻게 할것인가.

결국 정치지도자들의 맹성과 분발을 다시한번 촉구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운동"이 보다 큰 소리를 내어 이익집단들을 선도해
줄것을 기대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언론이 올바른 사회적 공론을 세우는 본래의 자기 기능에 보다
충실해 주기를 기원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국민 모두가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올바른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 각자는 과연 얼마나 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말로는 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실제 우리가 몸으로 행동하는 것은
멸공봉사형민주화, 즉 반민주화는 아닌가.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