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는 사실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좀 보내려 해도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어야만 하고
자주 거래하던 통장을 일일이 대조해 자기 것임을 확인해야만 하게됐다.

은행창구에 가보면 주민등록증을 집에 두고왔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을 아직도 종종 보게된다.

하지만 이런 불편은 실명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대목에서
의외의 "성과"를 올리게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둑을 잡은 것. 실명제
덕분에 범인을 잡은 것이다.

지난 5월 주차해둔 차에서 주민등록증과 1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0장을
훔친 범인이 한일은행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다가 덜미가 잡혔다.

범인이 제시한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본인의 얼굴이 다른 것을 이상하게
여긴 창구직원이 즉각 수표발행점으로 조회,분실신고된 수표임을 확인하고
청원경찰을 불러 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했다.

범인이 운전면허증과 수표를 각각 다른 곳에서 훔쳐 사용하다 잡힌 경우도
있다. 지난 4월4일 외환은행의 한 지점에 40대 남자가 김모씨의 운전면허증
과 김씨의 이름으로 배서된 1백만원권 자기앞수표 한장을 가지고 와
지급을 요구했다.

창구직원은 실명확인 과정에서 지급을 요구한 사람의 나이와 얼굴이 달라
수표에 배서된 본인이 아님을 발견하고 설명을 해 주었다. 본인이 아닌
경우에 수표를 현금으로 찾으려면 대리인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범인은 수표를 그자리에 내던지고 황급히 달아났다.

3일뒤 그 수표를 잃어버린 여모씨가 은행에 수표분실신고를 냈고 은행은
여씨에게 범인이 남기고 간 수표를 되돌려 주었다.

잃어버린 돈 1백만원을 찾게된 여씨에겐 실명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사례처럼 실명제는 범죄예방이나 해결장치로서 새로운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입증했다. 범인이 두고간 운전면허증은 경찰에
넘겨져 주인을 찾아갔다.

이밖에 실명제의 과표양성화 효과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회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례도 있었다. 세원노출이
어려운 대표적 업종인 미술품업계가 "백기"를 들고 나온 것.

지난 1월 서울 인사동의 대표적인 화랑인 학고재화랑은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의 가격과 거래실적 일체를 공개하고 관할 세무서에 자진해 제출했다.
미술계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도둑을 잡은 사례는 실명제를 "몰라서" 당한 케이스이고 화랑이 거래
내역을 신고한 것은 실명제를 "알아서" 취한 행동이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구석구석에서 실명제의 존재가 확인되는 과정에서
실명제는 관행으로 자리를 잡아갈 것임에 틀림없다.

<김선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