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4년 뒤인 1971년에 출발했던,이와쿠라도모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사절단은 네번째의 집단 해외나들이가 되는 셈인데, 그 규모면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단연 으뜸가는 것이었다.

막부 초기의 종교 사절이나 말기의 조약비준 사절, 그리고 만국박람회
사절은 다 한나라를 찾아간데 그쳤으나, 이번에는 무려 열두나라를 방문
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구성원도 전번과 달리 모두가 정부의 고관들이니
말이다.

46명이나 되는 고관들이 사이고다카모리에게 정부의 일을 맡겨놓고서 바다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폐번치현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뒤라 국내에 큰 문제는 이제 없을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구니쓰쿠리"(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착수하기 위해 선진
구여러 나라를 돌아보기로 한 것이었다.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제각기 자기가 조사하고 견문한 것을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하기로 미리 결의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바람이나 쐬며 구경이나 하는 그런 유람단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출발 당일부터 일기를 적는 사람이 많았다.

네사람의 부사 가운데 하나인 이토히로부미도 아멜리카호에 몸을 싣고
요코하마항을 떠난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성 대보(차관)였다. 정부 조직이 처음에는 2관6성이었는데, 그뒤
공부 문부 농상부 세 성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살
이었다.

이토히로부미는 명치 연대를 주름잡아 일본 근대사에 우뚝 두각을 나타낸
거물 정객이다. 그러나 그는 정한론의 실천에 앞장서서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을 지내며 한일합방의 길을 다져나간 장본인으로, 결국은 하얼빈 역두
에서 의사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지고만 침략의 원흉이기도 하다.

이토는 1841년에 조슈번의 구마게군 쓰카리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야시주소는 농민이었다. 열네 살 때 이토나오우에몬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성이 이토가 된 것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를 가장 숭배했는데, 혼자
집에서 습자 연습을 할 때면 언제나 나중에는 도요토미의 성명을 계속
써내려갔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 고도코가 물었다.

"왜 그 이름을 자꾸 쓰지?"

"내가 나중에 도요토미히데요시처럼 되려고요"

"그래? 호호호. 그렇게만 된다면..."

"어머니, 두고 보세요. 꼭 그렇게 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