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장으로 다시 복귀한 이후 영업실적이 비약적으로 신장되고
회사규모가 급속히 커지자 사옥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정부는 자본시장의 육성을 위해 증권관계관의 여의도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고, 우리 대신증권도 1982년 7월 27일 여의도에서
역사적인 사옥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그후 약3년에 걸친 대약사 끝에 드디어 1985년 6월 20일 신축사옥 준공식
및 본사이전 기념식을 갖게 되었다. 이날 기념식에서 나는 대내외에
대신증권의 여의도 시대가 개막했음을 당당히 선언하였다.

"이곳 여의도에 웅지의 터전을 마련하게 된것은 우리 대신의 역사에
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하게된 일이며, 정상 대신의 면오를 과시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의도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나는 내실을 다지기 위한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먼저 나는 경륜 높은 인사를 영입하기로 결심하고 유창순
전국무총리를 대신경제연구소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유회장과 나는 1945년 10월 조선은행 시절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신경제연구소 회장으로 모시려고
하니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가지고 유회장을 방문하여 그분의 의중을 정중히 타진
하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이 지났을때 유회장이 취임승낙 의사를
전달해왔다. 그때 나는 한없이 기쁘고 고마워서 어쩔줄 몰랐다. 우리
대신가족은 현재 유회장의 해박한 학식과 온화한 인간미에 항상 아낌없는
존경심을 보내고 있다.

한편 85년 하반기이후 증권시장이 계속적으로 활황을 보임에 따라
국민경제에 있어서 증권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증권산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증권사에 대한 일반국민의
인식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주식투자의 대중화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아울러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홍보활동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같은 의지에
따라 1986년 3월 처음으로 TV-CF를 제작했지만 의욕이 너무 앞서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열차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소리가 매우
경쾌하레 들리는 것이었다. 그소리는 마치 옛날 서당에서 "하늘천 따지."
하고 천자문을 읽을 때의 리듬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곧 우리정서에 잘맞는 3.3조가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까지 이르자 "큰대 믿을신"이라는 문구가 강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진주를 발견한 듯한 흥분으로 즉시 홍보담당자에게 전화로 이문구를
말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문구의 사용을 반대했지만
내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슬로건을 "큰대 믿을신"으로 교체한 후 새로운 TV-CF "차 살수 있어요"
편이 제작되었다. 이 광고는 1987년 10월12일부터 방송되기 시작하였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증권회사 하면 "큰대 믿을신"을
떠올리게 할만큼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나는 새로운 상품 또는 시스템을 소개하는 홍보 매체로서 방송광고
를 시의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특히 1989년 9월에 제작한 "금융그룹"편은 대산생명의 출범으로 <종합
금융그룹 대신>의 꿈이 실현되었음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나를 비롯하여 우리 모든 임직원들에개 크나큰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광고였다.

이같은 홍보 활동은 대신증권뿐 아니라 증권업계 전체의 이미지 제고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증권은 이같은 기업 이미지를 바탕으로
초대형 증권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