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하늘과 물밖에 없는 망망한 대해를 한 척의 외륜선이 파도를
가르며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미국 기선인 아메리카호였다. 태평양을 횡단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배에는 정확히 1백3명의 일본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46명은
이와쿠라도모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메이지 신정부의 사절단이었다.

부사는 오쿠보도시미치와 기도고인, 그리고 이토히로부미 야마구치나오요시
등이었다. 나머지 57명은 수행원과 화족, 혹은 사족인 유학생들이었다.

폐번치현의 대어변혁을 단행한 그해, 그러니까 1871년, 메이지 연호로는
4년 12월23일에 그 대사절단은 요코하마항을 출발했던 것이다.

목적은 신정부를 대표해서 조약을 맺은 구미 여러 나라를 예방하여 친선을
도모하며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교섭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정부의 고관들로 사절단을 구성한 것은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 나가는데 참고가 되도록 구미 선진국들의 정치 경제 사회 각분야의
제도를 조사하고, 각종 문물을 견문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선진국 시찰단인 셈이었다.

대상국은 미국을 비롯해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등 열두 나라였다.

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도는 것이었다. 예정을 10개월 반으로
잡고 있었다.

그처럼 대규모의 사절단이 바다 밖으로 나간게 처음은 아니었다. 막부
말기에 이미 두어차례 있었다.

일본의 배가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것은 1613년이었다.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지 10년뒤의 일로 2대 쇼군 히데다다시절이었다.

종교사절단인 하세쿠라쓰레나가가 이끄는 일행이 센다이번의 쓰키노우라를
출발하여 석달만에 태평양을 건너는데 성공해서 미국의 서해안인
캘리포니아의 북부 멘드시너라는 곳에 상륙하였다.

그뒤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쓰게 되어 외국과의 교섭이 끊어져
태평양을 건너는 일도 없었다.

1860년 그러니까 페리가 내항한지 7년뒤이며, 철권통치자였던
이이나오스케가 사쿠라다 문밖에서 자객들에게 살해당한 그해에 막부는
77명이나 되는 대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정사는 신미마사오키였고, 부사는 무라가키노리마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