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황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왔다. 그때 대신증권은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엄청난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가 스스로 문을 닫거나 정부에 의해
허가가 취소되어 간판을 내리는 것이 당시 실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나는 사고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최악의 사태는 막을수 있었다.

나는 피폐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에 있는 농장이 내가 갈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말이 좋아 농장이지 그곳은 황량한 들판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허술한 농막을 수리한후 가족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 허허 벌판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세상의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흙냄새를 맡으며 세파에 지친 몸을
달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공기 맑고 아름다운 시골에서 얼마간 평화로운 생활을 하자 다소 안정을
찾을수 있었다. 그러자 무엇인가 사업을 재개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에서
용솟음쳐 오는 것이었다.

나는 축산업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양계와 젖소사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전남대 후배가 농촌진흥청장으로 있어서 이 분야의
전문가를 소개받아 닭 기르기와 소 사육에 관해 자문을 받을수 있었다.

나는 곧 계사와 우사를 지었고 닭 1만5천수와 젖소 50두를 사육하였다.
그러나 역시 축산기술이 없어 애로가 많았으며 어쩔수 없이 목부를 고용
하게 되었다. 나는 목부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 나는 밤이 이슥한 시간에 목부들 숙소로 내려가 소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밤이 깊어져서 내 처소로 돌아오려
하지 목부들은 한사코 자고가라면서 발길을 막는 것이었다.

어쩔수 없이 목부들과 어울려 그 숙소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새벽일찍 잠이 깼는데 축사에서 풍겨나오는 악취가 어떻게나 고약한지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그러나 악취때문에 잠자리를 옮길수는 없었다. 목부들은 매일 그 곳에서
자는데 주인인 내가 악취를 못참아 자다말고 잠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나는 결국 냄새난다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날이 밝을때까지 꼬박 기다려야
했다. 아뭏든 나는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잤으며 새벽에는
오히려 일군들보다 일찍 일어났다.

젖을 짜내는일이 새벽4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무렵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문득문득 쓰라린 비탄과 회한에 젖곤
하였다. 그것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자의 처절한 운명인지도 몰랐다.

그당시에 내가 읽은 책들은 "기업의 실패",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같은
극한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고뇌에 찬 내용만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책에는 기업인이 크게 성공하려면 형무소생활 3년, 투병생활 3년,
야인생활 3년 가운데 한가지는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래야만 인생의 참맛을 알게되어 경영자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설명
이었다.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을수 없는 구절이었다.

초야에 묻혀 생활한지 3년째에 접어들고 있던 어느날 창업 초기의 대주주
몇사람이 농장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회사의 경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경영 일선으로 복귀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것이냐 말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날 고심하던
나는 대신증권을 다시 살려놓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히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