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우스웨스트항공의 로버트 켈러허회장(63).

1년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기업인이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을 지나면서 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클린턴대통령은 당시 미항공운수산업의 활로를 찾기 위해 민관합동의
항공운수산업개선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 US항공 델타 노스웨스트등
그야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대형항공사들의 회장들은 모두 이위원회에
들지 못했다.

대형항공사의 회장중 켈러허회장만이 유일하게 선정됐다. 이유는 간단
했다. 정부관리들로부터 베스트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난 몇년동안 다른 항공사들은 모두 적자에 허덕였지만 유독 켈러허
회장이 이끄는 사우스웨스트항공은 계속 흑자를 올렸다. 한술 더 떠
거의 모든 미국기업들이 경영혁신이라는 미명하에 종업원을 마구 자를
때에도 그는 달랐다. 지난 87년이래 켈러허회장은 단 한명도 해고시키지
않았다.

경기침체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 91년 사우스웨스트항공도 수익상태가
좋지 않았다. 적자까지는 안갔지만 이익이 수백만달러에 불과했다.

보통 1억~2억달러에 달했던 과거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익이었다. 남들
같으면 전국적으로 세차게 불던 감원선풍에 휩싸여서라도 상당수의
종업원을 해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켈러허는 결속이 기업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지론에 따라 아무도 내보내지 않았다.

종업원과 경영자간의 신뢰감과 그에따른 노사결속, 이는 켈러허회장의
경영철학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시절 여름방학때마다 부친이 근무하던 켐벨수프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막노동일을 하면서 그는 말단직원과 관리직간의
믿음과 결속이 기업성패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켈러허회장의 첫직업은 항공업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법원의 서기
였다. 2년간 서기생활을 한뒤 법률회사에서 몇년간 일했다.

그리고는 변호사로 나섰다. 변호사업에 뛰어든지 약 2년만인 1966년
어느날 그의 인생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고객이던
한 은행가가 그에게 아주 유망한 사업이 있으니 한번 같이 해보자고
제의했다. 통근항공기를 운행하자는 것이었다.

두사람은 곧 계획을 짜고 사업준비에 들어갔다. 자금은 은행가가 담당
하고 켈러허회장은 직원을 모집하고 비행기를 구입하거나 빌리는등의
경영을 맡았다.

5년간의 준비끝에 71년에 드디어 댈라스와 휴스턴을 왕복하는 통근여객기
를 띄웠다. 오늘날 연간 매출액이 23억달러에 달하는 국내노선항공사
사우스웨스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켈러허는 사업개시와 함께 독특한 경영전략을 펼쳤다. 그의 경영전략은
차별화였다. 기존 항공업체들과는 다른 마케팅시스템 경비절감방안을
채택했다.

마케팅에서는 여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비행기티켓을 판매하는 방식
을 택했다. 경비절감을 위해서는 여객기기종을 하나로 통일, 승무원교육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였다.

또 건당 1천달러가 넘는 경비에 대해서는 그자신이 직접 챙기고 있다.
부하직원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회장이 경비를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직원들이 경비절약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또 부하직원이 하는일을 회장도 하지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승무원이나 스튜어디스가 손이 모자라 쩔쩔 매면 회장인 자신도 직접
나서 손님들을 안내하고 짐도 들어준다. 상사와 부하간의 평등주의는
켈러허회장이 몸소 실천하는 사우스웨스트의 기업문화이다.

회장이 궂은 일을 마다않으니 일반직원들은 힘들고 짜증날때도 항상
웃음과 친절을 잃지 않고 탑승객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니 사우스웨스트항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의 이런 경영전략이 알려지자 미국항공업계에서는 그를 알고 그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지금 그를 미항공업계의 최고
경영인으로 꼽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