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의 연결과 그지역의 발전은 대단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리
항공기가 "뉴욕에 먼저 취항했더라면 로스앤젤레스에 앞서서 뉴욕에 먼저
코리아타운이 생겼을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만큼 항공노선의 개설은
여러가지 파급효과를 가져다준다.

대한항공이 미주에 여객기를 띄운뒤 재미동포들 사이에는 "KAK 타고
왔수다"하는 유행어도 생겨났다. 주미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기자 한분은
이 유행어를 제목으로 해서 책까지 출판해내기도 했다.

이무렵 국제 항공업계의 추세는 대형기에 의한 대량수송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대한항공에서도 "하늘의 궁전,항공기술의 총화"라고까지 예찬을
받는 보잉747 점보기 도입을 이미 추진하고 있었다. 이 계획은 70년 미국
보잉사와 점보기 2대 구입을 위한 가계약체결을 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형편으로선 대단히 야심찬 계획이었다.

보잉747기에 붙어다니는 "점보(Jumbo)라는 애칭은 런던의 어느 동물원에
있던 몸집 큰 코끼리에 붙여졌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후에 덩치가 큰
동물이면 "점보"라고 불렀다. 68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보잉747기가 유난히
동체가 커서 미국 기자들이 점보기라고 애칭을 붙였다는 말이 있다.

신생 대한항공이 당시 최첨단의 대형 점보기 도입을 결정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고 70년말 점보기 사진이 들어있는 연하장까지 돌리자 항간에는 내가
허세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오늘날 대당 1억5천만달러를 넘는 점보기를 당시 2대 도입하는데는 7천만
달러이상의 거금이 필요했다. 이만한 돈이면 세계 최대 규모의 화학비료
공장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런말들이 나올법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 사람들의 반신반의속에서도 차분히 도입을 추진하여 72년 드디어
정식으로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1번기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매스컴들은 "대한항공의 역사적 도약"이라고까지 평가하였다. 나
역시도 다시한번 새롭게 각오를 다지고 신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점보기 도입 결정을 내릴때까지 소요자금 기술 수요확보등의 문제로
사내에서도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인은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밀어부쳤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정확한 예측을 근거로하여 타이밍에 맞도록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만 기업의 번영을 도모할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어떤 의미에서 창업주로서의 본능이나 육감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최근 미국의 한 경영학자가 이러한 판단력이랄까 적응능력을
주제로하여 "본능의 경영학"이라는 책을 펴냈다는 것을 보니 그렇게
비과학적인 것만은 아닌듯하다.

당시 점보기 도입은 당장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후일 대한항공의 성장사
에 큰획을 그은 것임이 증명되기도 했다.

좀 뒤의 일이지만 74년9월에는 태평양상에 최초의 점보화물기를 투입해
서울~LA 노선에 취항하는 기록을 세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일본항공에 개인적으로 잘알던 고위 중역 한분이 있었는데 회사의
체면을 위한 것이라며 대한항공의 점보화물기 취항을 한달만 늦춰달라는
부탁을 해왔을만큼 이것은 빅 이벤트였다. 그러나 사업은 사업이고 우정은
우정이었다. 결국 태평양노선에서의 점보화물기 제1호 취항은 대한항공이
차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신생사로만 알려져있던 대한항공의 이러한 과감한
결단은 당시 선진을 자부하던 많은 항공사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사건"
이었다.

항공화물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플라잉 타이거사에서는 여러 채널로 반대
까지 해왔다. 영업상에 필요한 몇가지 합의를 하던중 8시간에 걸친 끈질긴
협상이 벌어졌다. 결국 "상대방 코를 밀고 잡아당기면 둘다 아플 뿐이니까,
서로 코를 꿰고 협조하자"는 식으로 겨우 타협을 볼수 있었다.

기업은 유기적인 조직체로서 이렇게 끊임없이 투입과 산출을 계속해야만
했다. 나아가 항상 새로운 서비스와 상품개발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활력의 유입이 없이는 도태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