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명인 서용석씨(54.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음악감독)의 풍채는 넉넉
하다. 그 여유로운 풍채가 늘어놓는 음악 속에 다양한 우리 국악의 장르들
이 녹아있다.

그는 "서용석류 대금산조"로 대금의 일가를 이룬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해금 아쟁 피리의 산조를 만들어내 연주자들에게 주고 서공철류 가야금산조
를 연주하고 많은 남도신민요를 작곡해 국악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넉넉한 풍채가 다재다능과 연결되는 보기드문 예의 하나가 서씨의
음악이다.

그가 지난92년 세밑에 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보유자후보로 지정됐을
때 주위에는 축하하는 이도 많았지만 위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스승들
이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고 10여년전 대금의 일가를 이뤘으니 바로 보유자
로 지정받았어야 했다는 것이 위로하는 이들의 얘기였다.

그의 국악인생 45년은 좋은 선생을 찾아다니며 배워 익히고 한군데서 배운
것을 다른 것에 응용해온 노력의 역사였다.

서씨는 이모인 명창 박초월씨에게서 여덟살무렵 귀동냥으로 판소리를
배웠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는 인근에 살며 제자들을 기르던 이모집을
학교 드나들듯 했다. 처음에 반대하던 박선생도 한번 시켜보고는 잘한다고
칭찬하며 가르쳐 주었다.

"아홉살 때였습니다. 평소 그렇게도 반대하시던 아버지가 단가 한마디만
불러보라고 하셨어요. "죽장망해" 한마디를 눈을 감고 부르는데 갑자기
뺨이 얼얼해졌습니다" 뺨을 맞아가면서도 판소리를 배우러 다니던 시절을
회고하는 서씨의 눈에는 어느새 이슬이 맺힌다. "심청가" "흥보가"를
배우던 추억보다는 그렇게 반대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워서다. 부친은
6.25당시 경찰시험에 응시했다는 전력이 문제돼 인민군에 의해 희생됐다.
아래로 남동생 여동생 한명씩, 그의 나이 열한살 때였다.

16세 때 서씨는 국악이 그리워 야반도주를 했다. 서울로 이사간 박선생을
찾아서였다. 물어물어 운니동의 이모집을 찾은 후 서씨의 국악수업은
본격화된다.

56년 이모부인 김광식선생에게서 경기음악풍 대금민속악을 배우기 시작
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체력과 근면성, 그리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
음감이 그의 실력을 부쩍부쩍 자라게 했다. 이후 60년 정철호선생에게 아쟁
을, 61년 한주환선생에게 대금산조를, 62년 서공철선생에게서 가야금
산조를, 같은 해 방태진선생에게서 태평소시나위를 배웠다.

"어린 마음에 판소리로는 이름을 날리기가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
같았지요. 악기를 배우면 당장 일자리도 생길 것 같았어요" 그는 20살
무렵부터 국극단에 들어가 대금반주를 해주며 8년간 전국을 누볐다. 이후
시립국악관현악단 창단멤버로 2년 근무하고 개인활동을 하다 79년8월 국립
국악원민속연주단에 입단했다. 그사이 60년 신인국악경연대회에서 대금산조
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을 필두로 77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기악부장원을
차지했고 82년 KBS국악대상에서 관악상을 수상했다.

그가 대금으로 일가를 이룬 것은 80년의 일이었다.

대금의 두 스승 김광식 한주환 선생은 모두 박종기선생의 제자였지만 특기
로 삼는 장르가 달랐다. 김선생이 경기음악풍으로 민속악의 대가였던데
비해 한선생은 남도풍의 산조가 장기였다. 두 스승의 장기를 이어받은 서씨
는 자신의 창의력을 더해 50분짜리 "서용석류 대금산조"를 만들어냈다.
개인의 이름을 붙인 대금산조는 그로부터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기본 구성위에 우조 계면조 변청계면조
본청계면조 등 음조의 다양한 변화가 그의 대금산조가 갖는 특징이다.

"줄소리(현악기)가 아무리 좋아도 대소리(관악기)만 못하고 대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목소리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저는 대소리
가 최고인 것 같아요" 청아한 음색에다 애절한 분위기가 있어 산속 야외
어디서든 불어도 자연의 소리와 잘 어울린다고 서씨는 대금자랑을 잊지
않는다.

"국악의해가 됐으니 국민학교부터 정책적으로 국악교육을 강화했으면
합니다. 조국의 음악을 모르는 아이들이 커서 무엇을 할까 걱정됩니다"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서씨는 국악가족을 이루었다. 남동생은 조통달이라
는 예명으로 전남 도립국악원 지휘자로 일하고 있다. 최산옥씨(54)와의
사이에 둔 4남중에 목회자의 길을 걷는 둘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악의 길
을 걷고 있다. 장남과 큰며느리는 아쟁과 해금을 전공한 중앙대 국악과
동창사이. 셋째는 추계예대에서 피리를, 막내는 중앙대에서 해금을 전공
하고 있다.

무작정 상경한 큰아들을 따라 서울에와 한 때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82세의 노모를 모시고 부천에서 살고있다.

<권령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