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29)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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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소기업은행 전무로 있는 동안 상공부 수출촉진회의에 참석,
중소기업수출문제에 관여하고 있었다.
78년10월 어느날 수출촉진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가는데 회의를
주재하던 심의환상공부차관(총무처장관역임)이 불러 심차관실로 갔다.
그는 "지금 경제상태가 말이 아닌데 박전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68년 정부에 통화긴축과 환율절상을 건의하다
보안잘못으로 하마터면 한국은행을 떠날뻔 했던 당시의 경제상황과 똑같은
사태가 77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설명부터 했다.
"지금 우리경제의 병은 중동건설계약이 급증함에따라 선수금으로 송금해온
외화를 처음엔 동결했다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풀어주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77년에는 화폐발행액이 36%,78년에는 47%수준으로 통화량이
급팽창함에 따라 인플레징조가 급속히 확산돼가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물가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투기가 머저 일어나고 대기업 중소기업
할것없이 기업전체가 지도를 펴놓고 어디를 살까를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땅투기에 여념이 없어 땅값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폭등하고
있습니다.
돈있는 남자뿐만 아니라 이제는 부인들이 날뛰어 "복부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입니다. 또 과잉통화가 수입을 촉진해서 77년 사상처음으로
1억2천만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것이 또다시 10억달러 적자로
반전 됐습니다. 이대로가면 원유값의 인상까지 겹쳐 79년엔 50억달러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습니다"심차관 앞에서 이렇게 나의 견해를 피력했다.
심차관은 "그렇지,통화를 너무 많이 팽창시켰으니 이꼴이 된거지"라며
나의 의견에 공감했다. 또 상공부입장에선 수출LC내도액의 증가세가
뚝떨어져 수출에 적신호가 켜졌고 수입면장발급은 급증,앞일이 걱정인데
어떻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통화를 우선 줄여야 전체경제가 건강해 지겠지만 수출이 안되는 것은
환율이 74년부터 5년간이나 달러당 4백84원대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가가 해마다 연평균 15%씩 뛰고 있으니 환율을 달러당 6백원대로
현실화 시켜야 수출증가세가 회복될것 같다고도 했다.
심차관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김용환장관과 의논해 봅시다. 박전무도
김장관과 친한 사이 아닙니까. 같이해봅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한달후 심차관이 수출촉진회의를 주재하고난후 다시 나를 보자고 하더니
"김장관이 환율을 바로잡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라며
"이대로가면 수출증가가 어렵게되고 수입은 촉진되어 국제수지가 큰일날것
같은데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그리고 후진국 곳곳에선 통화증발로 인해 병이
생기면 물가가 폭등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입을 촉진해서 가격상승을
우선 막고 환율을 올리면 수입품값이 올라 물가가 더욱 올라갈 것을
염려해서 환율절상을 할수 없게된다고 설명했다. 이때문에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고 대외부채가 증가,병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뿐아니라 후진국,특히 남미각국에서 자주 볼수있는 예라고 말했다.
"큰일이구만"하고 입맛만 다시는 심차관의 걱정스런 표정을 뒤로하고
차관실을 나왔다.
환율은 현실화되지 않고 68년과 똑같은 통화 과대공급 부동산투기 과소비
수입과다 국제수지악화라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가운데 78년12월22일 개각이
단행돼 신현확부총리와 김원기재무장관이 새로 취임했다. 당시 원유값은
배럴당 34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때문에 도매물가는 79년 18%,80년 39%까지
뛰어올랐다.
중소기업수출문제에 관여하고 있었다.
78년10월 어느날 수출촉진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가는데 회의를
주재하던 심의환상공부차관(총무처장관역임)이 불러 심차관실로 갔다.
그는 "지금 경제상태가 말이 아닌데 박전무는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68년 정부에 통화긴축과 환율절상을 건의하다
보안잘못으로 하마터면 한국은행을 떠날뻔 했던 당시의 경제상황과 똑같은
사태가 77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설명부터 했다.
"지금 우리경제의 병은 중동건설계약이 급증함에따라 선수금으로 송금해온
외화를 처음엔 동결했다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풀어주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77년에는 화폐발행액이 36%,78년에는 47%수준으로 통화량이
급팽창함에 따라 인플레징조가 급속히 확산돼가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물가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투기가 머저 일어나고 대기업 중소기업
할것없이 기업전체가 지도를 펴놓고 어디를 살까를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땅투기에 여념이 없어 땅값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폭등하고
있습니다.
돈있는 남자뿐만 아니라 이제는 부인들이 날뛰어 "복부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 입니다. 또 과잉통화가 수입을 촉진해서 77년 사상처음으로
1억2천만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것이 또다시 10억달러 적자로
반전 됐습니다. 이대로가면 원유값의 인상까지 겹쳐 79년엔 50억달러의
적자가 예상되고 있습니다"심차관 앞에서 이렇게 나의 견해를 피력했다.
심차관은 "그렇지,통화를 너무 많이 팽창시켰으니 이꼴이 된거지"라며
나의 의견에 공감했다. 또 상공부입장에선 수출LC내도액의 증가세가
뚝떨어져 수출에 적신호가 켜졌고 수입면장발급은 급증,앞일이 걱정인데
어떻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통화를 우선 줄여야 전체경제가 건강해 지겠지만 수출이 안되는 것은
환율이 74년부터 5년간이나 달러당 4백84원대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가가 해마다 연평균 15%씩 뛰고 있으니 환율을 달러당 6백원대로
현실화 시켜야 수출증가세가 회복될것 같다고도 했다.
심차관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김용환장관과 의논해 봅시다. 박전무도
김장관과 친한 사이 아닙니까. 같이해봅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헤어졌다.
한달후 심차관이 수출촉진회의를 주재하고난후 다시 나를 보자고 하더니
"김장관이 환율을 바로잡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왜 안하는지 모르겠어"라며
"이대로가면 수출증가가 어렵게되고 수입은 촉진되어 국제수지가 큰일날것
같은데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그리고 후진국 곳곳에선 통화증발로 인해 병이
생기면 물가가 폭등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입을 촉진해서 가격상승을
우선 막고 환율을 올리면 수입품값이 올라 물가가 더욱 올라갈 것을
염려해서 환율절상을 할수 없게된다고 설명했다. 이때문에 국제수지
적자가 커지고 대외부채가 증가,병은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뿐아니라 후진국,특히 남미각국에서 자주 볼수있는 예라고 말했다.
"큰일이구만"하고 입맛만 다시는 심차관의 걱정스런 표정을 뒤로하고
차관실을 나왔다.
환율은 현실화되지 않고 68년과 똑같은 통화 과대공급 부동산투기 과소비
수입과다 국제수지악화라는 악순환이 지속되는 가운데 78년12월22일 개각이
단행돼 신현확부총리와 김원기재무장관이 새로 취임했다. 당시 원유값은
배럴당 34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때문에 도매물가는 79년 18%,80년 39%까지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