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의 역사시간에 배운 것이 되살아나고 있다. 한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했을 때 정복한 민족의 문화가 정복당한 민족의 문화보다 앞서
있으면 강자가 그들의 문화를 약자에게 강요할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반대인 경우에는 패한 민족이 정복한 민족에게 그들의 문화를 밀어붙일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지금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일어나고 있다"
신생 소련의 최고권력자 레닌이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참석한
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의 일부이다. 그가 말한 "문화"는 조국과 혁명을
끌고갈 당의 지도자와 소련인민 전반의 질을 말한것이라고 뒷날
풀이되었다.

레닌은 10월혁명을 성공시킨지 꼭 4년만인 1921년말에 제1차
발작(뇌경색)을 일으켰다. 다음해 5월에는 오른쪽 하반신을 쓰지 못하고
사물에 대한 표현능력마저 상실했다. 그이후 잠깐 회복하는듯 했으나
12월에 또다시 쓰러졌다. 2차 발작으로 레닌은 거의 정무로부터 손을
뗄수밖에 없었지만 당내의 권력암투 때문에 고심했다. 스탈린을
중심으로한 토착좌파의 전횡이 심해지자 스탈린 당서기장의 해임을
골자로한 유언을 작성하고 스탈린에게 사과와 절연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편지를 구술했다. 바로 며칠뒤에 레닌은 또한번 발작을 일으켰다.
10개월간 투병끝에 1924년1월21일 "조용히"생을 마쳤다(54세).

레닌의 죽음은 스탈린과 그의 추종세력에게 권력다지기를 위한 절호의
"자료"가 되었다. "레닌주의"란 용어가 튀어나오고 "레닌신앙"이
급조되었다. 레닌의 장례식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장엄하게 치러
졌고 레닌묘는 성역화되었다. 미망인 크루우프사카야는 스탈린일파에 의해
조작된 개인숭배에 항의하고 "레닌묘 참배는 본인의 의사와는 정반대의
관행"이라고 고발했다. 레닌의 시신은 방부제로 입혀져 관속에 유폐되었고
전 수도 페테르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69년이란 긴세월을 레닌
은 전설의 화석으로 크렘린궁을 지켜야만했다.

옐친 러시아정부는 엊그제 레닌묘의 보초교대제를 없애버렸다.
수구세력에 시달려온 옐친이 구소련과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레닌이 일찍이 예고한 새문화의 물결이 그의 묘역에서부터 일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모스크바의 명물이 또하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