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창문 너머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봤다. 고등학생들이 졸업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며 스무 살 설렘을 가득 안고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대학 신입생 시절 첫 미팅 자리에서 했던 게임이 문득 기억을 스친다. 남학생들이 쪽지에 단어를 적으면 여학생들이 그중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골라 짝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사랑’ ‘별’ 같은 감성 섞인 단어를 적어냈지만, 나는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단어인 ‘길’을 적어냈다.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작은 여학생 한 명이 내 쪽지를 집어 들었다. 왜 ‘길’을 골랐느냐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길이라는 단어가 멋져 보여서”라고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설렜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캠퍼스를 걷던 풋풋한 청년도 어느새 머리가 희끗한 이순을 바라보는 중년이 됐다. 그날의 설렘도 이제는 희미해졌지만 ‘길’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세 아이의 아빠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리고 직장에서의 책임감으로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다. 물론 늘 쉽고 평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험난한 비포장도로로 빠지기도 했고, 때로는 방향을 잘못 잡아 한참을 헤매다 다시 제자리걸음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나만의 길을 선택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첫 번째는 나만의 자신감이다. 여전히 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내 선택이 옳은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선택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나
어떤 예술 작품들은 기괴하고 충격적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불편한 작품이 아름다운 그림보다 관객의 마음에 훨씬 더 크게 와닿는다. ‘충격 요법’으로 감각을 깨워 새로운 생각과 관점을 열어주기 때문이다.프랑스 출신 작가 피에르 위그(63)는 이 같은 충격적이고 기이한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잘 만드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에 단골로 참가하고,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밥 먹듯 개인전을 여는 게 그 증거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전시는 여러 해외 매체에서 ‘2024년 최고의 전시’로 꼽히며 찬사를 받았다.그 전시에 나왔던 작품들을 지금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위그의 개인전 ‘리미널’(경계)에서 볼 수 있다. 베네치아 피노컬렉션 미술관과 리움미술관 등이 공동 기획한 신작 등 최근 10여 년간의 주요작 12점이 나왔다. 그의 개인전이 아시아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거장이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명화는 좋아하지만 현대미술은 싫다’는 사람이 많다. 별것 아닌 작품을 장황한 이론과 설명으로 포장한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리미널’은 이런 생각을 바꿀 만한 전시다. 배경지식이나 이론을 몰라도, 명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도 ‘눈앞에서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전시는 미술관의 블랙박스 공간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관객은 자기 발조차 볼 수 없는 어둠에 압도당한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면 대형 영상 작품 ‘리미널’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기괴하게 움직이는 나체의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ls
오페라 가수 요나스 카우프만이 10년 만에 내한했다. 그는 모차르트로 대표되는 독일어 오페라 징슈필, 푸치니와 베르디의 이탈리안 오페라, 비제와 구노의 프렌치 오페라, 성악가들의 커리어 마지막 종착지인 바그너 오페라까지 섭렵해 세계 최고 테너 중 한 명으로 꼽힌다.지난 4일 카우프만과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의 리더아벤트(리트독창회)가 열린 롯데콘서트홀 객석엔 빈자리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카우프만은 2015년 첫 내한 콘서트 때 서른 번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열정적인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이날 카우프만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 흰 보타이를 맨 정갈한 연미복 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했다. 첫 곡은 슈만의 ‘12개의 가곡’ 중 제3곡 ‘방랑의 노래’였다. 독일에서 온 가객(歌客)은 “자~아직 취기가 남아 있을 때 떠나자”라는 가사로 시작한 방랑가를 목이 덜 풀린 듯한 음색으로 노래했다. 제10곡 ‘고요한 눈물’에서 카우프만은 과장하지 않은 발성으로 목을 풀듯, op.25 ‘미르테 꽃’ 제1곡 ‘헌정’을 부를 때는 미동 없는 자세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의 반만 들려주듯 각각 노래한 후 퇴장했다.두 번째 무대에서 몸이 풀린 듯한 카우프만은 리스트의 가곡 여섯 곡을 불렀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를 부를 때 그는 소리를 바깥으로 울려내기보다 몸 안 호흡의 압력만으로 음을 밀어내듯 노래했다. 3절에서 마이너풍으로 전개된 음악이 다시 희망을 찾은 후 외치듯 부른 가사 “O Gott”(독일어로 ‘오 신이시여’라는 뜻)의 고음은 이날 그가 들려준 첫 메조 포르테(mf) 음량 표현이었다.2부에서 카우프만은 브람스의 op.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