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기평씨(일명 박노해)가 안기부에
검거됨으로써 재야 노동운동가로서의 그의 실체가 벗겨지게 됐다.
"사노맹" 핵심인물이자 "박노해"란 가명으로 널리 알려진 박씨는
"노동의 새벽"이란 시집을 냈고 월간 "노동해방문학"지에 노동해방 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의 시.평론등을 많이 기고하여 노동자들로부터 "얼굴없는
지하 노동시인"으로 불리어 왔다.
박씨는 77년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 82-84년 운전기사로 일했으며
84-85년 안양소재 (주)안남운수의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운전사와
안내원들에게 의식화학습을 시키다가 해고됐다.
박씨는 김일성생일인 89.4.15 제작한"박노해 시인의 긴급호소,북조선과
김주석은 남한민중의 벗인가 적인가"제하 유인물에서"북조선 근로인민의
자랑스런 대표자,주체적 강성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뜨거운 감격을
떨리는 입술로 당신을 부른다.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등의 찬양시를
게재한데 이어 89년11월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 (사노맹)을
결성,중앙위원겸 편집책으로 활동해 오다 국가보안법위반
(이적단체구성등) 혐의로 수배를 받아 왔었다.
박씨의 가명인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해방"의 준말로,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83년말께 당시 문단에 새바람을 몰고 왔던 ''시와
경제''라는 시동인지의 제2집에 ''박노해''라는 필명으로''시다의 꿈''
등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박씨는 그후 84년9월 풀빛출판사에서 시집 ''노동의 새벽''을
발간,시인으로 데뷔했는데 이 시집으로 88년 1월 실천문학사가
제정한 ''제1회노동문학상''을 받았으며 시집도 매월 1천여부씩 지금까지
7만여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었다.
박씨는 지난 83년 경동교회 의식화 학습때 현재의 부인
김진주씨(36.사노맹중앙 위원.이대 약대졸.구속)를 만나 결혼했다.
부인 김씨는 81년11월부터 86년10월까지 구로공단내 ''YB LEE 상사''에
시누이 박미숙씨의 명의로 위장취업했다가 회사측의 압력으로 자퇴한
경력도 갖고있으며 그뒤 89년 4월이후 ''한승호''라는 가명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경향성을 비판한다''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