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에너지연구소 창립30돌...발자취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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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계의 못자리 한국에너지연구소(소장 한필순)가 창립30돌을
맞았다.
*** 핵연료 국산화 / 입자가속기 개발 성공 ***
1959년 지금의 서울 공릉 서울대공대 4호관을 빌려 한국원자력연구소로
출발한 에저니연구소는 15일 대덕한국에너지연구소에서 30주년 기념식과
"21세기 원자력의 미래"를 주제로한 국제세미나및 핵연료국산화를 이루고
타계한 서경수박사의 흉상제막식/홈커밍행사등을 펼친다.
*** 59년 원자력연구소로 출범...81년에 개명 ***
"원자로부" "기초연구부" "동위원소부"등 3개부로 나눠 일했던 1959년
초대 원자로 부장으로 일한 윤세원박사(전 경희대부총장)는 6.25이후 미국에
유학갔다가 막 돌아온 20-30대들이 모여 의욕넘치게 일했음을 회고한다.
"원자력연구소의 발족은 전후 우리과학계에 활력과 생기를 준 동시에
국민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기초과학없이는 과학기술에 발전이 없다는 것을 부르짖으며 일한 것이
어제일처럼 새롭다"
영국 런던대에서 핵물리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 61년부터 기초
연구부장으로 일한 이상수박사(KIST원장)의 감회이다.
"황무지 같던 과학계에 연구의 중요성을 알렸고 기초훈련의 기회를 제공
했으며 많은 과학도들이 계속 공부할 길을 열어 주었다"
김호길박사(포항공대학장)는 과학계에 끼친 공헌을 꼽고 있다.
당시 함께 일한 동료로는 이동영박사(포항공대교수) 오세웅박사(")
김헌준박사(에너지연구소 서울분소장)등.
이동영박사는 당시 1,400전자볼트짜리 중성자발생장치연구에 성공,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서 사오는 문제를 해결했고 그 업적으로 3.1문화상을 탔다.
*** 과학계 인재 많이 배출...암등 방사선치료 새장 열어 ***
과학계의 중진/거물인사들은 거의가 이곳을 거쳤다.
최형섭 성좌경 박긍식 이관박사등 많은 과기처장관을 비롯, 최상 (서강대
부총장) 채영복(화학연구소소장) 이병호(KIST 물리학과 명예교수) 이준택
(인하대교수) 이영재박사(경희대)등 헤아릴수 없다.
*** 62년 원자로 첫 가동...이젠 건설기술 확보 ***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진 것은 정부의 계획보다는 대세에 의해서.
53년 미국에 의해 원자력의 평화적이용이 제안되며 57년 세계원자력기구
(IAEA)가 발족되고 58년 한-미원자력 쌍무협정이 이뤄지는등의 움직임이
계속됐다.
59년 7월에는 트리가마크2 연구용원자로가 기공돼 62년 정상가동되기 시작
했으며 중성자물리/원자로동특성연구 원자로제어등 원자로를 직접 이용
하는 연구가 비롯되었다.
또 원자로에서 생산되는 각종 방사성동위원소의 공급으로 활발한 공업적/
의학적/농학적 연구가 가능해졌다.
"트리가마크2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이 기증했으며 원자로 가격만큼은
기구를 미국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실험하다보니 중성자양이 부족, 69년
6월 열출력 100kw를 자력으로 250kw로 증가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이상수
박사는 회고한다.
1969-72년에는 2,000kw 트리가마크3의 건조계획이 진행되었고 69년 코발트
60치료장치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면서 방사선치료의 새전기를 만들었다.
원자력연구소가 생긴지 10년이 지나고 에너지파동을 겪으며 우리경제계는
원자력발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1978년 고리1호기가 준공, 22번째
핵발전보유국으로 원자력 발전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그동안 원자력발전기반기술을 개발, 한전에 넘겨주었다.
원자력 에저니자립을 하는데 중요한 것이 핵연료 주기 기술의 확보.
한국산 우라늄은 품위가 낮고 경제성이 적어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핵연료 또한 핵무기 확산과 관련돼 국제정세에 따라 공급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 외국의 우라늄 자원탐사에 직접 참여하여 핵연료 자원
확보에 노력하는 한편 핵연료주기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으로 발전시켰다.
동공단은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77년 미카터
대통령의 핵무기 확산억제정책의 여파로 빛을 보지 못했다.
81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에너지 연구소로 개명했으며 한국핵연료공단을
통합했다.
현재 대덕에너지연구소에는 91년까지를 목표로 30년 축적한 우리의 기술
능력을 총체적으로 실증할 3만w급 다목적연구용(MRR)원자로가 건설되고
있다.
맞았다.
*** 핵연료 국산화 / 입자가속기 개발 성공 ***
1959년 지금의 서울 공릉 서울대공대 4호관을 빌려 한국원자력연구소로
출발한 에저니연구소는 15일 대덕한국에너지연구소에서 30주년 기념식과
"21세기 원자력의 미래"를 주제로한 국제세미나및 핵연료국산화를 이루고
타계한 서경수박사의 흉상제막식/홈커밍행사등을 펼친다.
*** 59년 원자력연구소로 출범...81년에 개명 ***
"원자로부" "기초연구부" "동위원소부"등 3개부로 나눠 일했던 1959년
초대 원자로 부장으로 일한 윤세원박사(전 경희대부총장)는 6.25이후 미국에
유학갔다가 막 돌아온 20-30대들이 모여 의욕넘치게 일했음을 회고한다.
"원자력연구소의 발족은 전후 우리과학계에 활력과 생기를 준 동시에
국민들에게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기초과학없이는 과학기술에 발전이 없다는 것을 부르짖으며 일한 것이
어제일처럼 새롭다"
영국 런던대에서 핵물리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 61년부터 기초
연구부장으로 일한 이상수박사(KIST원장)의 감회이다.
"황무지 같던 과학계에 연구의 중요성을 알렸고 기초훈련의 기회를 제공
했으며 많은 과학도들이 계속 공부할 길을 열어 주었다"
김호길박사(포항공대학장)는 과학계에 끼친 공헌을 꼽고 있다.
당시 함께 일한 동료로는 이동영박사(포항공대교수) 오세웅박사(")
김헌준박사(에너지연구소 서울분소장)등.
이동영박사는 당시 1,400전자볼트짜리 중성자발생장치연구에 성공,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서 사오는 문제를 해결했고 그 업적으로 3.1문화상을 탔다.
*** 과학계 인재 많이 배출...암등 방사선치료 새장 열어 ***
과학계의 중진/거물인사들은 거의가 이곳을 거쳤다.
최형섭 성좌경 박긍식 이관박사등 많은 과기처장관을 비롯, 최상 (서강대
부총장) 채영복(화학연구소소장) 이병호(KIST 물리학과 명예교수) 이준택
(인하대교수) 이영재박사(경희대)등 헤아릴수 없다.
*** 62년 원자로 첫 가동...이젠 건설기술 확보 ***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세워진 것은 정부의 계획보다는 대세에 의해서.
53년 미국에 의해 원자력의 평화적이용이 제안되며 57년 세계원자력기구
(IAEA)가 발족되고 58년 한-미원자력 쌍무협정이 이뤄지는등의 움직임이
계속됐다.
59년 7월에는 트리가마크2 연구용원자로가 기공돼 62년 정상가동되기 시작
했으며 중성자물리/원자로동특성연구 원자로제어등 원자로를 직접 이용
하는 연구가 비롯되었다.
또 원자로에서 생산되는 각종 방사성동위원소의 공급으로 활발한 공업적/
의학적/농학적 연구가 가능해졌다.
"트리가마크2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이 기증했으며 원자로 가격만큼은
기구를 미국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실험하다보니 중성자양이 부족, 69년
6월 열출력 100kw를 자력으로 250kw로 증가시키는데 성공했다"고 이상수
박사는 회고한다.
1969-72년에는 2,000kw 트리가마크3의 건조계획이 진행되었고 69년 코발트
60치료장치를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면서 방사선치료의 새전기를 만들었다.
원자력연구소가 생긴지 10년이 지나고 에너지파동을 겪으며 우리경제계는
원자력발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1978년 고리1호기가 준공, 22번째
핵발전보유국으로 원자력 발전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그동안 원자력발전기반기술을 개발, 한전에 넘겨주었다.
원자력 에저니자립을 하는데 중요한 것이 핵연료 주기 기술의 확보.
한국산 우라늄은 품위가 낮고 경제성이 적어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핵연료 또한 핵무기 확산과 관련돼 국제정세에 따라 공급차질을 빚을
우려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 외국의 우라늄 자원탐사에 직접 참여하여 핵연료 자원
확보에 노력하는 한편 핵연료주기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한국핵연료개발공단
으로 발전시켰다.
동공단은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77년 미카터
대통령의 핵무기 확산억제정책의 여파로 빛을 보지 못했다.
81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에너지 연구소로 개명했으며 한국핵연료공단을
통합했다.
현재 대덕에너지연구소에는 91년까지를 목표로 30년 축적한 우리의 기술
능력을 총체적으로 실증할 3만w급 다목적연구용(MRR)원자로가 건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