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등지는 자리가 상석인 이유

독일 작가 발터 슈미트 '공간의 심리학' 번역 출간

사회생활을 해본 한국인이라면 식당에서 자리를 잡을 때 벽을 등지고 출입문을 마주 보는 자리가 상석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상석'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자리가 선호되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독일 작가 발터 슈미트가 쓴 '공간의 심리학'(반니)은 특정한 자리를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이유처럼 공간을 둘러싼 심리의 기저를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공간심리학 전공자의 조언과 여러 연구 결과들을 인용해 가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공간의 공식들을 재미있게 풀어간다. 사람들이 머물 공간을 선택할 때는 그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나름의 기제가 작동한다.

식당에서 벽을 등지는 자리는 시야가 180도로 제한돼 뒤쪽을 볼 수 없는 인간에게 뒤편의 위험을 보완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입사 면접을 보는 경우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낯선 환경에서 면접관들과 마주해야 하는 지원자는 당장 도망쳐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나마 출구가 가깝다면 조금이라도 긴장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입사 지원자가 문 쪽에 자리한 면접관을 지나 사무실 제일 안쪽에 앉아 면접을 보는 일이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안전 최우선의 원칙에 따라 선택하는 공간의 또 다른 예로 잠자리를 들 수 있다.

독일 연구팀이 138명의 실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디지털 속 가상 침실을 꾸미게 했더니 대부분이 침대를 침실 문이 잘 보이는 위치에 놓았고 침실문과 침대는 약간 대각선을 이루도록 배치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침입에 대비하려는 심리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의 침대를 함께 배치하도록 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대부분 자신의 침대를 문 가까이 배치하고 자녀의 침대는 출입문에서 가장 먼 벽 쪽에 문과 대각선이 되는 곳에 두었다.

카페나 식당, 비행기 좌석을 예약할 때 보통은 창가 자리가 선호된다.

회사의 고위급일수록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사무실을 배정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창밖 풍경은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를 넓혀주고 긴장을 풀어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인간의 감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생활 리듬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횡단보도에서 어떤 사람이 빨간불에 길을 건너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건너거나 산행 중 앞서가던 사람이 정해진 등산로를 벗어나 풀밭을 가로질러 가면 일행도 아닌 다른 사람들까지 그를 따라가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군중심리 전문가에 따르면 이런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거울 신경'이다.

거울 신경은 남이 웃거나 찡그릴 때 같은 표정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신경체계다.

이런 동조 욕구에는 안전을 위해 무리 짓고 싶어하는 심리 외에도 맨 앞사람에게 일종의 '지뢰 탐지견' 역할을 맡기려는 심리도 작용한다.
공간심리에는 남녀간 차이가 있다.

등산객 무리를 보면 대개는 남성이 앞서고 여성은 몇 걸음 뒤처져 따라간다.

남성의 걸음걸이가 좀 더 빠른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진화심리학자는 남성이 목표지향적으로 걷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남성은 목표 지점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여성에게는 목적지로 나아가는 과정이 곧 목적이라는 설명이다.

남녀의 이 같은 차이는 쇼핑할 때 잘 드러난다.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얼마나 거리를 둬야 하는지는 민감한 문제다.

한 연구자는 살갗에서 주변으로 45~50㎝까지를 '밀접영역'으로 분류한다.

손이나 발을 제외한 '몸'이 타인의 밀접영역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허가가 필요하며 허가 없이 접근하다가는 거부되거나 밀쳐질 수 있다.

밀접영역 다음으로는 '사적영역' 또는 '개인적 간격'으로 불리는 공간이 있다.

몸에서 50~120㎝ 거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가까운 지인이라든가 파티 같은 곳에서 만난 호감 가는 상대 등이 이 영역에 머무를 수 있다.

누가 얼마나 내 영역을 침범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불쾌한지 등에 대한 판단 기준은 문화권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남미, 아프리카, 아랍권 사람들, 유럽 중에서도 지중해 문화권 사람들은 대화 상대와의 거리가 독일인이나 영국인보다 가깝고 신체 접촉도 비교적 쉽게 이뤄진다.

또 남성이 여성들보다 서로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고 나이가 들수록 더 거리를 둔다.

타인이 자신의 밀접영역이나 사적영역을 침범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방어신호는 팔짱 끼기이다.

만일 내가 다가가려는데 상대방이 팔짱을 낀다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좋다.

상대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슬쩍 비틀거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는 것, 나아가 위에 겹친 다리를 상대 쪽으로 좀 더 뻗는 것도 방어 표시일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접촉하려 할 때 유지해야 할 간격은 1.2~3m이고 이 공간은 '사회적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 영역에 들어서려면 상대에게 자신의 접근을 허용하는지 여부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방문 앞에서 노크하거나 길을 물을 때 조금 멀리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고 우연히 길에서 지인을 만났을 때 무작정 달려가지 않고 일단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책은 이런 것들을 포함해 공간심리에 관한 50가지 주제에 관해 사례 연구를 곁들여 설명한다.

타인과 접촉할 때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 알아두면 유용한 지식을 담았다. 문항심 옮김. 304쪽. 1만5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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