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수요를 늘려야 경제가 산다"…"억지로 늘린 투자, 대공황 불렀다"

케인스 하이에크 / 니컬러스 웝숏 지음 / 김홍식 옮김 / 부키 / 632쪽 / 2만5000원

엽서 한 장서 시작된 두 경제학자의 인연
100년 논쟁으로 팽팽하게 대립
경제학 역사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논쟁을 벌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인연은 엽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빈의 젊은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1927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케인스에게 엽서를 보냈다. 50년 전 프랜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가 쓴 《수리정신학》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담은 엽서였다. 당시 하이에크는 무명이었지만 케인스는 이미 영국 재무부 협상가로 활동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바람과 달리 케인스는 평범한 엽서에 “애석하게도 수중에 ‘수리정신학’ 재고가 다 떨어졌군요”라는 한 줄짜리 답장을 보냈다.

《케인스 하이에크》는 경제학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두 명의 학자가 100년 가까이 벌인 논쟁을 정리하고 있다. 두 사람 생전의 논쟁은 물론 2008년 금융위기와 더불어 이들이 재조명되는 흐름까지 살펴보고 있다.

케인스는 앨프리드 마셜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케임브리지대학 중심의 영국 경제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하이에크의 뿌리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설파하는 자본투자이론 중심의 유럽 대륙 경제학파였다. 런던 정경대학(LSE)은 케임브리지를 누르고 영국 경제이론의 산실로 발돋움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학장이던 윌리엄 베버리지가 데려온 소장 경제학자가 오스트리아학파의 새내기 하이에크였다.

무성의한 답장을 받은 지 4년 뒤인 1931년 여름 하이에크가 학술지 ‘이코노미카’에 케인스의 ‘화폐론’을 비판하는 서평을 기고하면서 운명적인 논쟁이 시작됐다. 케인스는 이 서평을 보고 엄청나게 분노했고, 같은 해 11월 하이에크에 대한 반론을 이코노미카에 썼다. 둘은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불황의 해법을 놓고도 대립했다. 케인스는 저축되는 돈이 투자되는 돈보다 많아지면 불황 국면이 나타나고 그에 동반해 물가가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물가 상승은 저축을 늘림으로써 억제할 수 있고 불황은 투자를 확대하고 총수요를 늘려 해결할 수 있다. 케인스는 이런 수요를 만들어낼 기업이 없다면 정부가 공공사업을 통해 자체적으로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하이에크는 불황이란 생산자가 은행 융자로 돈을 빌려 자본재를 더 많이 생산하는 경우 등으로 통화량이 늘어나 신용이 과잉 팽창한 결과라고 봤다. 대공황도 투자가 저축보다 많아서 발생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위적으로 조절해 저축과 투자에 개입하는 것을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 국가가 통화시스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경기 순환도, 불황도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케인스는 1960년대까지 경제학계를 지배했지만 1970년대 불황기 이후 하이에크에게 헤게모니가 넘어갔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부시 미국 대통령이 무덤에서 케인스를 불러내면서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날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예배당에서 단둘이 밤을 지새기도 했다. 나치에 반대했던 두 학자가 함께 독일 폭격기들을 경계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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