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아랍권 민중봉기 원동력은 IT

통신 발달 독재 타도로 이어져…정권부패에 '국민 심판' 보여줘
꼭 1년 전 이집트를 처음 여행했다. 우리 일행을 이집트 두 곳(카이로와 룩소르)에 안내해준 사람은 한국에 유학왔던 젊은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카이로대 교수이고,남동생 역시 일본어를 가르치는 카이로대 교수라고 했다. 이 청년은 피라미드를 포함한 유적들을 아주 유창한 한국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는 가끔 자기 나라 현실에 대해 불만스런 논평도 했는데,대학 교수가 낙타 주인보다 수입이 적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대목은 교수의 낮은 월급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한국에서 유학하고서도 이집트 대학에서 한국 문화를 가르칠 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울적하게 했다. 그는 한국 관광객을 가끔 안내하지만,다른 변변한 일자리를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무바라크 다음은 그의 아들이 계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는 지나가듯 말했다. 정말로 1년 전의 이집트에는 거리마다 무바라크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었다. 28년 독재자가 1년 뒤 이렇게 쫓겨나리라고는 그나 나나 예측할 수 없었다. 이번 혁명의 불길을 처음 지핀 사람은 26세의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였다. 대학을 나온 실업자로서 노점상을 시작하려다 그마저 경찰에 걸리자,그는 지난해 12월17일 분신자살을 시도해 1월5일 사망했다. 그의 항의에 동조한 농성과 데모는 23년 장기 집권한 벤 알리를 몰아냈다. 재스민이 튀니지의 나라 꽃이라서 '재스민 혁명'이라 불리는 이 혁명의 폭풍은 걷잡을 수 없게 이웃나라로 번졌다. 이미 이집트의 무바라크를 몰아냈는가 하면,리비아에서는 39년 독재의 카다피를 거의 몰락시킨 상황이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전 세계의 장기 집권자들과 독재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1949년 건국 이래 일당독재국인 중국에서조차 '말리화'(茉莉花 · 재스민) 바람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이런 민중 봉기의 가장 큰 원동력은 정보화다. 인구 1000만명의 튀니지에서 350만명이 인터넷을 상용하고,그 가운데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이용한다. 인구의 반 이상이 25세 이하라는 젊은 나라에서 소식은 좋고 나쁘고를 가릴 것 없이 순식간에 전국에 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때맞춰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벤 알리 일가의 호사스런 생활이 인터넷 상에 퍼지면서 사태는 더 악화됐다. 정부와 기업의 비윤리적 행위를 고발한다고 2006년 아이슬란드에서 시작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이미 추방됐거나 추방당할 세 독재자의 재산규모는 이제 세계의 화제가 됐다. 튀니지의 벤 알리 재산은 9조원,이집트의 무바라크는 77조원,그리고 리비아의 카다피는 170조원이란 추산이다. 어차피 부패가 만연하고,고실업에 고물가로 시달리는 민중은 기회가 있으면 폭발한다. 그 폭발을 가장 심하게 자극하는 것은 바로 지도자의 부패타락이다. 물론 사회와 정치 구조,종교적 성향 등에 따라 그 반응은 다르겠지만.

교육의 보급이 사회 불안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잘 보여준다. 프랑스혁명이 그러했고,우리의 경우 신라 말의 중국 유학이나 고려 말 유학자들의 성장이 사회 불안의 요인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오늘날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 혁명은 옛날의 교육 보급보다 훨씬 강력한 화약고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의 부패가 순식간에 민중에게 알려질 수 있으니 말이다. 장기 집권자라도 깨끗한 정치를 할 수만 있다면 권력 유지가 조금은 쉬워질까?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쥐고 호사스럽게 살지 않을 사람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쨌거나 이제 무바라크도 사라졌으니,이집트의 그 청년이 이집트의 어느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얻었으면 좋겠다.

박성래 <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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