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유전자정보 은행

사람의 목숨에 관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없을 듯 싶다. 예로부터 각국이 목숨과 관련된 사건의 경우 갖가지 과학적 기법을 활용해 구체적인 사인까지 밝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일게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이미 살인사건의 수사와 검시 지침을 체계적으로 담은 '무원록(無寃錄)'이란 종합법의학서를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세종 때 무원록 내용을 알기 쉽게 해석한 '신주(新註)무원록'이 발간돼 300년 이상 검시분야 교과서로 통용됐다. '원통함이 없게 하기 위한 기록'이라는 책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억울한 죽음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 지 가늠해볼 수 있을 법하다. 주요 선진국들 또한 각종 사인 규명에 힘을 쏟아온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근래 들어서는 유전자를 이용한 사인규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국은 성폭행범을 대상으로 1995년에 세계 최초로 국가 주도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데 이어 살인강도 차량절도 등으로 적용 대상을 계속 확대해 왔으며,미국도 1998년에 연방정부 차원에서 유전자정보은행을 설립했다. 아시아에서도 홍콩이 2000년에 정부 산하연구소에 유전자자료은행을 설립했으며,싱가포르도 유전자자료은행을 운영 중이다. 강력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특정 집단의 유전자를 채취해 분석한 뒤 전산으로 입력해 보관하는 유전자정보은행을 핵심 인프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유전자은행 설립방안을 내놓고 유전자 수집대상과 방법을 다듬은 새 법안을 준비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중반 유전자분석기법이 도입된 데 이어 범죄수사와 대형 재난 · 재해사건의 희생자 신원파악 등에 한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정보은행 설립 추진과 '유전자 감식정보 수집 · 관리법안'제정 작업은 그동안 지지부진한 형편이었다. 범죄자의 인권침해 문제를 내걸고 일부 시민단체 등이 강력 반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날로 교묘해지고 빨라지는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과학수사 외에 뾰족한 수단도 없다. 유전자은행 등 기초 인프라를 갖추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김경식 논설위원 kimks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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