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칼럼] 또 하나의 디지털 미스터리

디지털에서 힘 못 쓰는 대기업
'모른다'는 자각이 해결의 출발점

안재석 한국경제TV 뉴스콘텐츠국장
간장 신제품 보고회 자리. 김 팀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소비자들이 기억하기 쉽도록 이름을 ‘청정원 양조간장’으로 심플하게 정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박 상무가 한마디 거든다. “깔끔하네. 근데 ‘100% 자연숙성’이라는 것도 강조하면 좋지 않을까?” 결재 라인을 밟을 때마다 ‘사소한’ 의견이 하나씩 덧칠된다. 그렇게 정해진 최종 상품명은? 짜잔! ‘청정원 햇살담은 11년 이상 씨간장 숙성공법 양조간장 골드.’

2년 전 식품기업 청정원이 유튜브에 띄운 홍보 영상이다. 제목은 ‘대한민국에서 이름이 가장 기~~인 간장 이야기’. 단박에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많은 회사원이 무릎을 치며 이렇게 혼잣말했다. “남 얘기 같지가 않네.”기업은 매일이 전쟁이다. 깜빡 졸면 문득 지옥이다. 화성까지 날아갈 것 같던 테슬라 주가도 순식간에 반토막이 난다. 신입사원부터 고위 임원까지 늘 긴장 속에 사는 이유다. 근데 이상하다. 열심히 일할수록, 모두가 바짝 신경을 쓸수록 배가 산으로 갈 때가 많다. 디지털 산업에선 이런 일이 더 흔하다.

e커머스 시장에서 ‘은밀히’ 도는 우스갯소리 하나. 골프에서 그린에 공을 안착시키면 ‘나이스온!’이라고 외친다. 그린에 올리긴 했지만 아쉽게도 핀에서 멀찍이 떨어진 경우는 ‘제주도온’이라고 한다. ‘나이스!’라고 외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라는 뜻이다. e커머스 업종 사람들은 종종 이를 달리 부른다. ‘롯데온!’이라며 키득댄다. 롯데라는 거함이 온라인 시장에서는 유독 힘을 못 쓰는 미스터리를 빗댄 말이다. 신세계그룹 계열사인 SSG닷컴도 기대 이하다. 상장이 지연되면서 사모펀드와 1조원의 투자금을 놓고 분쟁 중이다.

금융 쪽도 마찬가지다. 우리은행은 2016년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타도! 카카오톡!’ 지향점도 분명했다. ‘모바일뱅킹과 메신저를 결합해 신개념 금융 플랫폼으로 키운다.’ 이름은 ‘위비톡’으로 정했다. 곧바로 은행 직원들이 총동원됐다. 지인들은 앱을 까는 귀찮음으로 우정을 증명해야 했고, 은행 창구를 찾은 고객들은 뭔가 깔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눈치에 시달렸다. 단기간에 가입자 500만 명을 달성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몇 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사라졌다. 삼성도 예외는 아니다. 기라성 같은 금융 계열사를 하나로 묶어 ‘모니모’라는 통합 앱을 출시했지만, 성과는 기대를 밑돌았다. 최근엔 KB금융그룹과 손을 잡는 승부수까지 띄웠다. 이젠 디지털금융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까? 아직은 ‘글쎄요’라는 시장 반응이 우세하다.대기업이 유독 디지털 세상에서 고전하는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하다. 개발자와 최고경영자(CEO)가 거의 한 몸인 정보기술(IT) 기업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리스크를 지지 않으려는 태도. 바꿔 말하면 그만큼 지켜야 할 게 많다는 뜻이다. 의사결정 단계를 거칠 때마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장치가 하나둘 추가된다. 전문성의 역전 현상도 전투력을 갉아먹는 요인이다. 기존 기업은 CEO에 가까워질수록 IT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IT 기업과 정반대다. 잘 모를수록 더 많은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디지털’과 무관한 업종은 찾기 힘들다. 모든 기업이 디지털 전략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디지털 미스터리를 푸는 출발점은 단순하다. ‘내가 모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是知也)’ 공자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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