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강간의 역사

강간(强姦)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페미니즘의 대두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페미니즘이 강간을 ''희생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기 전까지 강간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강간의 희생자가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로 간주되기는 커녕 가해자와의 공범 내지는 신세망친 여자, 심지어는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자''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오늘날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강간 피해자를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역사학자이자 파리 제5대학 교수인 조르주 비가렐로의 저서 「강간의 역사」(당대)는 강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통해 시대별 가치관의 변천사를 고찰한 책이다. 책은 근대 초기 프랑스의 성폭력에 대한 상대적인 관용의 역사와 희생자에 대해서는 수치심이라는 족쇄를 채워 비난하는 역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성을 남성에 대한 타자(他者)로 취급하던 근대의 역사에서 강간은 대수롭지 않은 범죄로 취급됐으며 오히려 피해자가 유부녀일 경우 소유권에 대한 침해 또는 귀부인일 경우 신분제도에 대한 도전이라는 관점이 더 큰 이슈로 부각됐다. 하층민 여성을 상대로 한 상층민 남성의 강간보다 상층민 여성에 대한 하층민 남성의 강간행위가 훨씬 엄격하게 처벌됐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창녀에 대한 강간은범죄로 취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 분석을 통해 앙시앵 레짐(구제도)이라는 엄격한 신분체제하에서 가해자의 신분이나 위세에 억눌리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공공연히행사되던 폭행을 오랫동안 묵시적으로 용인해 왔던 폭력에 대한 감수성, 인간의 몸과 그에 대한 시선과 도덕의 복잡한 뒤엉킴을 보여준다. 또 18세기 말의 성폭력에 대한 법적 태도와 19세기 들어 강간에서 도덕적 폭력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추적하는 한편 새로운 법의학의 탄생 및 성폭행 재판과정에서 범죄심리학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19세기에 강간 희생자의 수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강간이 인간존재자체에 위협을 가하는 범죄로 인식되기까지에는 남성, 여성, 아동 등이 상호동등한 인간주체로 인식되고 이것이 제도화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다. 특히 20세기 들어 활성화된 페미니스트 운동이 강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막대한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강간을 비롯한 모든 성폭력 행위는 이제 더이상 희생자까지 방탕에 감염될 우려성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신적 살해''와 ''인간내면에 대한 공격''이라는 관점에서 인식되기에 이른다. 비가렐로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강간에 대한 인식의 변천사를 마무리한다. "강간의 결과는 이제 더 이상 타락이 아니라 정체성의 균열, 희생자가 영원히 지니고 살아야 할 것 같은 깊은 상처이다. 여기서 성폭력은 1급 폭력, 순수성의 이상으로 여겨지는 한 존재를 침해하는 것이기에 더욱 더 잔혹한 범죄로 자리매김된다" 408쪽. 1만3천원.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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