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디자인 선진국으로 가는 길 .. 이순인

이순인 요즘 많은 외국의 디자이너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그들 대부분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조선시대 복식을 보고 세밀한 자수와 매듭에 놀라곤 한다.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날렵하게 마무리지은 한옥의 처마선도 마찬가지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서도 이들이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혼을 불어놓었던 장인들의 솜씨에서 "감성을 울리는 디자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난 세계산업디자인협회장 아우구스토 모렐로는 이탈리아 디자인제품을 세계최고로 끌어올리는데 공헌한 디자인계의 거장으로서 우리나라 민속박물관을 둘러보고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양의 모종삽보다 훨씬 인체공학적이며 기능적인 "호미", 숟가락과 젓가락의 조화, 이탈리아 디자인40여년을 이끌어온 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디자인 모티브를 제공했기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한국의 디자인이 선진국을 좇아가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2001년에 열릴 세계 산업디자인총회를 유치하기 위해 필자는 러시아등 동구권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 정부의 디자인정책과 기업의 경영환경을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오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고유 이미지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과거 20여년간 디자인개발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기업의 상품을 보고 디자인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최고의 디자인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동차 가전제품 등 제조업분야에서 우리나라의 기술투자 생산능력은 세계 5위권에 꼽히면서도 디자인 지명도는 그렇지 못하다. 그만큼 우리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우리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야할 때이다. 세계 여러나라가 일본의 경제력을 부러워하면서도 일본을 모방의 나라로 몰아붙이는 것도 결국 그들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상품에 배어있지 않기때문이다. 디자인경쟁력을 좌우하는 또다른 하나로 기업의 디자인 투자마인드를 들수 있다. 20여년전 "포니"를 디자인했던 이탈리아 디자이너 주지아로는 일본이 선진국을 따라가는 것처럼 한국도 일본을 따라가는 인상이 짙다며 가장 큰 원인으로 2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경영자의 의식을 꼽았다. 일본의 유명한 디자인전문회사중 하나인 GK사의 에쿠안 겐지 회장이 올초 열린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람회"를 둘러보고 자기 회사의 젊은 디자이너 3명을 한국에 보내 관람케한 적이 있다. 디자인부문에 대한 한국의 왕성한 R&D활동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한국의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을 보고는 너무나 실망했다고 한다. 디자인붐은 대단하지만 막상 천편일률적이고 특색없는 상품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산업디자인이 부가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은 기업인들 사이에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경영주가 "디자인이 좋아야 한다"라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디자인이 경영과 깊은 관련이 있다든지, 또는 기업경쟁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우리것, 우리문화에 대한 애착이 부족하고 기업의 투자마인드가 경영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 오늘의 우리 현실을 낳게 되었다. 올해 통상산업부의 산업디자인 기반기술사업으로 선정된 연구과제를 보면 상당수가 전통과 디자인의 새로운 접목을 꾀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에게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절실함을 느낄수 있다. 늦은감이 있으나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라도 신기술에 투자하는 만큼 산업디자인에 적극 투자하고 우리 전통과 문화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여 디자인과 상품에 있어 우리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야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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