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자칼럼 > 한국미의 뿌리

9월의 인물. 고유섭 (1905 1944)이라면 모르는 이가 더 많을성 싶다.아마도 상징적인 인물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일까. 어쩌면 미술사가인그의 이름을 잘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것 같다. 한국미의 본질을파헤지고,근대미술사의 기초를 다진 그를 가졌다는건 우리의 자랑이다.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건 한국인으로선 오직 그 한사람뿐이었다. 그만치 희귀한 존재일수 밖에 없다. 화가는 많아도 막상미술사의 체계화에 이바지한 이는 드물었다. 그는 결코 화려할것도 없는학문분야에서 열정을 쏟다가 갓 마흔살에 세상을 떴다. 짧은생애였지만,1백30여편의 주옥같은 논문과 저술을 남겼다. 한마디로불꽃인생이었다. 한국미의 특징은 무기교의 기교와 단아함,무관심성에있다고 주장한 그의 미학은 오늘에 와서도 빛을 뿜는다. 33년부터 타계할때까지 11년간은 개성박물관장으로 지낸다. 이때 길러낸후학이 황수영 진홍섭 최순우등 이른바 "개성 삼걸"이다. 그자신은 국어학에서의 주시경과도 비유되는바 평단에선 "시대의 한계를뛰어넘은 천재""학계에 미술사와 고고학의 방법론을 확립한 큰 스승"등으로기린다. 1920년대의 미술평론은 거의 황무지였다. 내로라한 평가 대신,급우생일관객 무명생등의 미술평론이 더러 눈에 띄곤 했다. 당시는 닉명성이통할만치 폐쇄적인 풍토였음을 알수 있다. 춘원과 수주등도 붓을들었으며,춘원은 역사소설의 고증을 위해 고유섭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닌적도 있었다. 재미있는건 소설가 이태준이 미술평론가로선 제1호였다는사실이다. 그는 3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부문에서 "조선화단의회고와 전망"으로 당선의 영예를 안은 것이었다. "우현의 달"을 맞아 알찬 행사들이 펼져진다. 도서출판 통문 에선"고유섭전집"4권을 펴낼 계획이고,출생지인 인천에선 9월2일 그의 동상제막식을 갖는다. 그의 저서"한국탑파의 연구""한국미술사 및미학논고"등은 빼어난 업적일뿐 아니라,한국미의 재현과 계승을 위해서도값진 유산이 아닐수 없다. 음식과 의복,예절과 건축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미학에다 근거를 둔우리의 전통문화를 얘기하자면,적어도 우현 고유섭의 이름쯤은 기억해둘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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