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역술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백운산 한국역술인협회장은 요즘 휴대폰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면 잘 받지 않는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에겐 먼저 팩시밀리로 용건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밀려드는 상담 문의에 일일이 응대하기 힘든 탓이다.

백 회장은 "어느 정당이 몇 석이나 얻을 수 있을 것인지와 총선에 출마하려는 개개인의 운세가 좋은지,그리고 정당 대표 등 유력 정치인과 자신의 사주가 화합하는지 등이 요즘 찾아오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라고 말했다.

대선 점술 흥행이 '꽝'이지만 점(占)집을 찾는 정치권 인사들의 발길은 여전하다.

내년 총선에 나서려는 정치권 주변 인사들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좋은 캐스팅을 기대하는 연예인,승진을 원하는 고위 관료나 대기업 임원들도 주요 고객이다.

대학입시 전형이 수시와 정시로 다양화된 데다 복수지원이 가능해 자녀 입학 관련 점 수요는 다소 줄었다.

◆점집을 찾는 사람들

서울 합정동에서 한국역학연구소를 운영하는 김동완 한국역학학회 회장도 정치권 인사들이 자주 찾는 역술가로 통한다.

그는 "내년 총선을 준비하는 정치권 인사들과 함께 연예인,공무원 그리고 입시나 결혼 등 집안 대소사를 앞둔 주부들이 주된 고객"이라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동국대 사회교육원 등 외부 강연이 잦은 그와 상담하려면 한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게 주변 전언이다.

역술인들에 따르면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지위나 빈부에 구분이 없다.

고위 관료나 대기업 임원 가운데 인사철이 돌아오면 꼭 운세를 본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실제 유명 점집에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은밀히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다.

종교도 점 수요를 막지는 못한다.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운세를 보는 사람이 꽤 된다고 역술인들은 밝혔다.

서울 서초동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인 김모 변호사는 계절에 한 번쯤 점집을 찾는다.

그는 "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운세를 보고 좋지 않은 게 있으면 대비하기 위해 단골 점집을 두고 있다"며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유명 역술가들의 엉터리 대선 예언으로 점집들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지만,대부분의 역술인들은 별 영향이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다만 최근에는 점집의 성격에 따라 경기에 영향을 받거나 입시 운세 상담이 줄어든 경우는 있다고 밝혔다.

이화여대 앞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는 A씨는 "대선 예언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가 많지 않느냐"며 "서민들이 많이 찾는 역술인의 경우 경기가 좋지 않으면 손님이 줄곤한다"고 전했다.

한국역술인협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점술인(역술인+무속인) 수는 적게 잡아서 45만명,많게는 55만명에 달한다.

줄잡아 19세 이상 성인인구 70∼80명당 1명꼴이다.

관련 매출은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인터넷 등 온라인 점술산업을 포함할 경우 2조5000억원에서 4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점집의 진화…압구정 사주밸리

역술인들은 운세를 알고 싶어하는 수요층은 오히려 넓어지는 추세라고 지적한다.

20∼30대 여성층을 중심으로 애정운,직장운 등을 사주카페나 인터넷 사주 등을 통해 부담없이 알아보는 문화가 널리 확산된 상태라는 설명이다.

과거 역술촌하면 서울 미아리와 이대앞이 유명했으나 요즘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사주밸리'도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

2000년 들어 젊은층의 기호에 맞춰 하나둘씩 문을 연 점집이나 사주카페가 이제는 40여곳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예언의 집'을 운영 중인 김경린 사장은 "미아리의 경우는 주로 나이든 사람이나 정치인이 많이 가는 데 반해 압구정동은 고등학생부터 대학생,정치인,공무원,사업가,연예계쪽 인사 등 다양하다"며 "이곳의 특징은 소문이 빨라 실력이 없으면 바로 퇴출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인터넷이나 전화 등을 통한 온라인 운세도 번성하고 있다.

인터넷 운세정보사이트는 사주닷컴의 경우 연간 유료 이용자가 10만명 이상으로 장기적으로 코스닥시장 상장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을 정도다.

사주닷컴 관계자는 "오프라인 점집 외에 온라인 서비스를 함께 제공하는 역술인들이 많다"며 "전화운수 등을 포함한 전체 온라인서비스는 수만개에 달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역술인들의 고학력화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역술인협회는 자체 운영하는 역술인력 양성프로그램에는 전직 공무원 출신은 물론 해외에서 대학을 마친 사람까지 등록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기획취재부=김수언/주용석 기자 indept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