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훌륭한 사외이사라 해도 내부에서 추천이 이뤄진 것은 문제다. 이사회 구성 과정이 좀 더 공개적이어야 한다.”

정부의 ‘재벌정책’을 총괄하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2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 이사회는 굉장히 폐쇄적이고 획일적”이라며 삼성을 ‘콕’ 집어 비판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지난달 22일과 23일 삼성의 핵심 계열사인 삼성물산과 삼성전자는 이사회를 열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이사회 산하 위원회 멤버를 전원(3명) 사외이사로 꾸렸다. 종전엔 사내이사를 겸하는 최고경영자(CEO)가 들어갔다.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 내부 입김이 반영될 만한 ‘싹’을 아예 없앤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JY의 '뉴삼성' 조용한 변화… 사회친화·지배구조 '큰 그림' 그린다
◆발동 걸린 ‘JY(이재용)의 뉴삼성’

경제계에서는 “사외이사 모범기업으로 꼽히는 포스코나 KB금융지주도 주저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삼성이 전격 도입했다”고 놀라워했다. 하지만 정작 삼성은 이 사실을 홈페이지에 올렸을 뿐 외부에는 전혀 홍보하지 않았다. ‘삼성 저격수’로 불리는 김 위원장이 사실 관계를 알지 못한 채 삼성을 비판한 사연이다.

삼성이 ‘소리 소문 없이’ 바뀌고 있다. 삼성의 경쟁력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원동력으로 평가받았던 경영 원칙도 시대 흐름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고 있다. 글로벌 기준과 실용주의를 추구하던 기존 경영 방식에 더해 ‘사회 친화적 색채’가 짙어지고 있는 점도 과거엔 볼 수 없었던 변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월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 이런 움직임들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삼성의 핵심 경영진은 전했다.

삼성전자서비스가 지난 17일 협력사 직원 8000여 명을 직접 고용키로 한 결정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약 5년간 끌어온 삼성전자서비스의 ‘불법파견’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삼성 내부에서조차 “검찰이 노조 와해 문건을 들고 수뇌부를 압박하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고육책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 삼성 측 핵심 관계자는 “검찰 수사가 하나의 계기가 됐을지는 모르지만 직접 고용하는 방안은 2014년부터 깊이 있게 논의돼 지난해 상반기 이미 결정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발표하려 했지만 ‘삼성이 새 정권에 선물 보따리를 내놨다’는 오해를 살까봐 미뤄 왔다는 것이다.

◆‘글로벌·실용주의·사회친화’가 키워드

삼성SDI가 지난 10일 삼성물산 주식 404만 주(2.1%)를 전격 매각한 결정에도 이건희 회장 시절엔 볼 수 없던 이 부회장만의 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은 남아 있는 7개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삼성SDI 외 삼성전기(2.61%)와 삼성화재(1.37%)가 들고 있는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한다는 원칙을 세우고도 수년간 세부 매각 방식을 정하지 못했다. 지배구조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상황에서 앞으로 삼성 계열사를 지배할 삼성물산 지분을 굳이 외부에 팔아야 하느냐는 지적 때문이었다. 삼성 안팎에서 이 부회장 일가나 삼성에 우호적인 ‘백기사’가 삼성물산 지분을 사들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삼성SDI는 ‘블록딜’ 방식으로 물산 지분을 시장에 분산 매각했다. “지분의 많고 적음보다는 회사에 비전을 줄 수 있는 경영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이 부회장 철학이 반영됐다는 설명이다.

삼성 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지난 1월 삼성전자 주식 액면분할 결정도 이 부회장이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 톱다운식으로 검토가 진행됐다”고 전했다. 삼성은 당시 액면가를 5000원에서 100원으로 쪼개는 액면분할을 전격 발표해 국내외 투자자들을 놀라게 했다. 과거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체제 아래선 소액주주들과의 소모적인 분쟁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금기시한 방안이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긴호흡’을 갖고 기업인이 가야 할 바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삼성이 그동안 내부적으로 고민해온 사안들에 대해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해법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걸음들이 모여 하나의 족적(足跡)이 형성될 때 비로소 ‘JY의 뉴삼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변화를 외부에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뇌물죄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단이 남아 있는 현실적인 상황도 고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삼성 창립 80주년을 맞은 지난달 22일 별도 행사 없이 유럽 출장을 떠난 이유다.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 시절의 ‘제2의 창업’이나 ‘신경영’과 같은 선언적 행사는 당분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