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제목도 모른 채 예술적 자유로움 채웠죠"
독일 무대 미술가 페터 팝스트(73·사진)는 무용과 오페라, 연극, 영화 등의 무대와 의상을 담당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다. 1980년부터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와 함께 공연을 만들어 바우쉬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2009년 바우쉬가 갑자기 타계한 뒤에도 그의 무용단인 탄츠테아터 부퍼탈이 원작대로 공연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팝스트의 공이 크다.

팝스트가 지난 22일 서울 역삼동 GS타워의 한 세미나실 연단에 섰다. 24~27일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바우쉬의 유작 ‘스위트 맘보’ 공연을 앞두고 LG아트센터가 마련한 관객 참여 프로그램 LAMP 강연에 나선 것. 100여명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우쉬와의 작업은 다른 공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참고할 자료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연극이나 오페라라면 대본 내용과 악보 흐름에 따라 무대 디자인과 활용법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바우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채로 공연 준비를 시작했어요. 공연 제목도 음악도 몰랐죠.”

바우쉬는 서른 명 정도의 무용수와 문답을 반복하며 공연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바우쉬가 질문하면 무용수가 말이나 몸짓으로 답하고, 이를 기록해 공연 장면을 쌓아 가는 식이다.

“바우쉬는 제게 한 번도 무대를 어떻게 만들라고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공간을 먼저 제시하면 거기서 가능성을 읽어내려고 했죠. 처음엔 ‘공연 내용이 아직 안 정해졌나요?’라고 물었지만 점점 ‘일단 뭐든 채워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러다 볼 만한 무대 모형을 만들면 그에게 보여줬죠.”

무대 모형을 본 뒤 바우쉬가 ‘이런저런 장면에 쓸 수 있겠다’라고 말하면 놔두고, 별 말 없이 자리를 뜨면 다시 만들었다. 작업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했다. 그는 “공연 3주 전에야 공연장에 설계서를 제출하고, 부랴부랴 무대 제작에 나서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회고했다.

힘들지는 않았을까. 팝스트는 “예술적 자유로움을 한껏 즐길 수 있어 좋았다”고 답했다. 덕분에 그만의 독특한 무대를 꾸미게 됐다는 설명이다. “모든 게 열린 상태였으니 새로운 표현에 도전할 수 있었죠. 그래서 30년간 함께 작업했고요.”

팝스트의 무대는 독특하면서도 간결하다. 무대 위를 꽃이나 나무로 덮어버리거나, 공연 중간에 한쪽 벽면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했다. ‘탄츠 아벤트2’ 공연에선 눈이 쌓인 언덕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 위에 소금 10t을 올렸다. 무용수들이 소금 알갱이 위에서 움직이다 보니 독특한 춤이 나왔다. 그는 “공연은 복합예술이고 무대는 공연의 일부이므로 튀지 않고 공연 자체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스위트 맘보’에선 무대에 길고 커다란 반투명 천을 늘어뜨렸다. 바람에 날리는 천의 움직임이 무용수 몸짓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30년간 바우쉬와 작업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더 이상 춤이 낯설지 않아요. 평생 춤을 춰본 적은 별로 없지만요.”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