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법인에 대한 업무정지를 과징금 5억원으로 대체하는 게 말이 되나요. 있어도 쓸 수 없는 ‘그림의 떡’ 같은 조항입니다.”

24일 기자와 만난 회계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사태’로 촉발된 최근 회계업계 상황이 산동회계법인이 문을 닫은 2000년대 초의 데자뷔처럼 느껴진다”며 한숨을 쉬었다. 당시 회계업계 2~3위이던 산동은 외부감사를 맡은 대우그룹 분식회계의 역풍으로 업무정지 12개월의 제재를 받은 뒤 해산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2001년 4월 금융당국은 ‘외부감사 강화 및 실효성 제고’ ‘분식회계에 대한 조사 감리 및 책임추궁 강화’ ‘사회적 통제환경 조성’ 등을 골자로 하는 분식회계 근절 방안을 발표했다. 16년 뒤인 지난 1월 금융당국이 발표한 회계투명성 제고 방안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는 근절 방안 내용에는 ‘부실감사 회계법인에 대해 영업정지 등의 제재보다는 과징금 부과를 적극 활용해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방안에 따라 공인회계사법에 신설된 조항이 과징금이다. ‘감사 또는 증명에 중대한 착오나 누락’이 있어 업무정지나 직무정지 처분을 해야 할 경우라도 ‘이해관계인 등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공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제재를 과징금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한 게 골자다. 개별감리 양정기준에 포함돼 있던 ‘등록취소’나 ‘업무정지’와 같은 강력한 조치들은 별도 문단으로 분리했다.

당시 법 개정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산동이 해산된 이후 투자자 보호와 회계법인 조직 차원의 감사 노하우 축적 및 피감사회사의 계속감사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며 “대형 회계법인에 대한 업무정지가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장을 고려해 과징금 등 경제적 제재를 적극 활용하자는 게 당시 법 개정의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 야심차게 이뤄진 법 개정안은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지적이다. 과징금 수준이 지나치게 낮아서 실효성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회계법인에 5억원 이하, 회계사는 1억원 이하로 정해진 부과 한도는 이후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분식회계에 연루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회계법인에 과징금만 5억원을 때린다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다른 나라들은 과징금 관련 규정을 마련할 때 위반 규모를 기준으로 과징금을 정한다든지, 아니면 물가 상승률에 따라 과징금을 계속 올리도록 하는 등 제재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우리 금융당국 공무원들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혀 사후관리를 하지 않았다.

대우조선해양 부실감사로 행정제재를 앞두고 있는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이 해당 조항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같은 과징금 조항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환경조차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문제다. 설사 적용이 가능하다고 해도 과징금 수준이 너무 낮아 ‘솜방망이 처벌’이란 비판이 제기될 게 틀림없다.

중대한 위법행위를 한 기업(기관)에는 마땅히 강도 높은 징계를 해야 한다. 하지만 17년 전 대우사태라는 뼈아픈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금융당국의 책임이다. 이번에도 ‘제재만 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론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업계 사정에 밝은 전문가 그룹에서 엄청난 질타를 받을 것이다. ‘보신주의’ ‘면피주의’ 등의 거친 단어들과 함께….

이유정 증권부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