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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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부자 순위 65위, 자산 규모 179억달러(약 21조6000억원), 무자비한 ‘기업 사냥꾼’. 투자회사 아이칸엔터프라이즈의 칼 아이칸 회장(81·사진)이 가진 타이틀이다. 8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는 날카로운 눈빛과 냉철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다. 유대계 투자자들이 으레 그렇듯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돈에 대한 엄격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돈벌이나 위험을 감내하는 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투자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철학·의학·군입대… 방황 이어져

아이칸은 1936년 미국 뉴욕 퀸스의 파락어웨이에서 태어났다. 흑인, 유대인, 아일랜드계 등 다양한 인종이 거주하는 가난한 지역이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지만 일을 하지 않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돈이나 투자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하길 두려워했다”며 “늘 ‘이것도, 저것도 하지말라’며 주의를 줬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변호사였지만 돈을 벌어온 적이 없다”고 떠올렸다. 일하는 대신 유대인 교회인 ‘시나고그’에서 성가대 선창자 활동에 열성이었다.

부모는 아이칸에게 아이비리그 합격증을 가져오지 않으면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가 다니던 파락어웨이고등학교에서 아이비리그에 입학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선생님은 “아이비리그에서 이런 지역 학생을 뽑을 리 없다. 지원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몇몇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고, 1950년 프린스턴대에 합격했다. 등록금만 지원받을 수 있었다. 방값이나 식사 등 다른 비용은 모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프린스턴대에선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논문 제목은 ‘의미의 경험적 기준을 충분한 해설로 표현하는 문제’라는 다소 난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우습게도 철학 공부가 기업 인수 마인드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뒤 뉴욕대 의대에 입학했지만 2년 만에 그만뒀다. 시체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의사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대를 그만둔 뒤 군에 입대했다. 그곳에서 포커 등 게임으로 꽤 많은 돈을 따기도 했다. 돈 버는 데 감이 있었다.

월가로 뛰어들다

군복무를 마친 뒤인 1961년 아이칸은 월가로 뛰어들었다. 증권회사인 드레이퍼스에 수습직원으로 취업했다. 시장이 호황일 때였다. 돈에 대한 감각이 있었는지 고객들에게 유망한 주식을 추천해주며 인기를 얻었다. 주식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해 12월부터 ‘케네디 폭락’이라고 불리는 대폭락이 시작됐다. 이듬해 6월까지 S&P500지수는 20% 이상 하락했다. 번 돈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후 그는 직업과 회사를 바꿨다. 1963년 몇몇 투자회사에서 옵션 매니저로 일했다. 회사에 꽤 많은 돈을 벌어다줬다. 자신의 회사를 차릴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외삼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외삼촌은 사무용품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아이칸은 그에게 투자로 얼마간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게 도왔고, 40만달러를 투자받을 수 있었다. 외삼촌은 그에게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주식을 직접 거래할 수 있는 권리인 ‘좌석’도 사줬다. 1968년 자신의 회사인 아이칸앤드코를 설립했다. 옵션과 차익거래에 집중한 투자회사였다. 첫해 150만~2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무자비한 ‘기업 사냥꾼’

1978년, 아이칸의 레이더에 한 기업이 포착됐다. 오하이오에 본사를 둔 가전기업인 태판이었다. 태판 주가가 저평가됐다고 판단한 그는 주식을 사들였고, 이사회에 의석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딕 태판 회장은 그가 태판을 인수하거나 이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따로 떼어 매각할 것을 우려해 스위스 가전기업인 AB일렉트로룩스에 회사를 팔았다. 태판을 인수하지는 못했지만 소득은 있었다. 인수 발표 후 주가가 두 배로 급등했고, 아이칸은 주식을 팔아치워 27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아이칸이 스타급 ‘기업 사냥꾼’으로 부상한 건 1985년 미국 항공사 트랜스월드에어라인(TWA)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성공하면서부터다. 당시 TWA는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칸은 TWA를 헐값에 사들였고,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수익을 높이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다. 가지고 있던 항공기를 팔아버리고, 대신 임대해 비용을 줄였다. 노조와의 협상을 주주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끌기도 했다.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울어가는 TWA를 정상으로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2001년 아메리카에어라인의 모기업인 AMR에 매각했다.

이어 담배제조업체 RJR나비스코, 석유회사 텍사코, 철강회사 USX 등 조금이라도 문제점이 보이면 달려들었다. 그의 투자 방식은 적극적으로 경영권에 개입하는 행동주의 투자다. 소극적인 투자와는 달리 저평가된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경영진을 압박하거나 이사회 의석을 얻는 방법으로 경영에 직접 참여한다. 그 과정에서 지배구조 변화나 주주배당 등을 끌어내 주주이익을 극대화한다. 한번 눈독을 들이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스타일에 ‘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과의 악연도 있다. 아이칸은 2006년 KT&G 지분 6.6%를 매입한 뒤 사측에 보유 부동산 처분을 통한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 등을 요구했다. 1년여의 분쟁 끝에 KT&G는 경영권을 지켜냈지만 반쪽의 성공이었다. 아이칸이 이 투자로 벌어들인 시세차익은 1400억원에 달했다.

“친구 필요 없다”…트럼프 ‘절친’

악덕한 기업 사냥꾼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지만, 그의 돈에 대한 감각과 집념은 알아줄 만하다. 뉴욕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쉬는 시간에도 일한다”고 말해 워커홀릭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골프도 치지 않는다.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한 직원이 “많은 돈을 벌었으면서 왜 쉬지 않느냐”고 묻자 “골프는 쳐서 뭐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친구도 필요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월가에서 친구를 원하면 차라리 개나 한 마리 사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절친’으로 통한다. 트럼프 당선자는 그에게 이미 한자리를 내줬다. 규제 완화 특별 보좌관으로 아이칸을 지명한 것이다. 아이칸은 기꺼이 자리를 수락했다. 그는 차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선임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의외의 면모는 기부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의대를 그만뒀지만 의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는지 미국 마운트 사이나이 의대에 2억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홍윤정 기자 yj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