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에 다시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 달러화 강세와 미 국채금리 상승세가 이어지면서다. 이에 따른 달러 유출과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이번에는 터키가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인도 루피화 가치는 사상 최저치로 곤두박질쳤다.

◆‘트럼프 쇼크’ 터키·인도로 확산

터키 중앙은행은 24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연 7.5%에서 8.0%로 0.5%포인트 인상했다. 금리 인상은 2014년 1월 이후 2년10개월 만에 처음이다. 1주일 전 단행된 멕시코 중앙은행의 행보와 닮은꼴이다.

멕시코는 지난 17일 기준금리를 연 5.25%로 0.5%포인트 끌어올렸다. 시장이 전망한 인상폭(0.25%)의 두 배에 달했다. 터키 외환시장 참가자들도 금리 인상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지만 인상폭은 0.25%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외환시장 반응도 같았다. 이날 터키 리라화 가치는 금리인상 후 반짝 올랐지만 곧바로 달러당 3.34리라까지 하락했다. 미 대선 직후인 9일부터 24일까지 리라화 가치는 달러 대비 7.39% 급락했다. 멕시코 역시 기준금리를 올린 당일 페소화 가치가 떨어졌다. 대선 이후 하락폭은 13%에 이른다.

이날 인도 루피화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3년 6월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 축소 방침과 함께 나타난 ‘테이퍼 탠트럼(긴축발작)’ 당시보다 낮은 달러당 68.86루피까지 추락했다.

◆‘취약 5개국’에 또다시 위험신호

남아프리카공화국 중앙은행은 이날 정책금리를 연 7%로 유지했지만 인플레이션 위험을 지적하며 긴축 통화정책으로 선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아공 랜드화 가치는 미 대선 이후 6.7% 하락했다.

터키, 인도, 남아공은 모두 테이퍼 탠트럼 당시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취약 5개국(Fragile 5)’으로 지목한 리스트에 들어 있다. 리스트에 포함된 브라질 헤알화 가치도 미 대선 후 외국인 투자금이 빠져나가면서 8.3% 급락했다. 나머지 한 곳인 인도네시아는 루피아화 가치가 하락하지 않도록 중앙은행이 선물환시장 개입을 단행했다.

투자자들은 신흥국이 급격한 외화 유출에 대응할 수 있는 외환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지 옥석을 가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블룸버그통신이 16개 신흥국의 단기외채 규모와 외화자금 유출입 흐름 등을 기준으로 ‘적정 외환보유액’을 산정한 뒤 각국의 외환보유액을 비교한 결과 말레이시아와 터키, 남아공은 실제 보유액이 적정 보유액을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레이시아는 단기외채가 1282억달러에 달하지만 올 연말 외환보유액이 1000억달러에 그칠 것으로 예상돼 위험도가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적정 수준을 20%가량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초과율은 16개 신흥국 중 11위에 그쳤다.

블룸버그는 “미 대선 후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120억달러 이상의 주식과 채권을 팔았다”고 보도했다.

◆중국, 위안화 약세 용인?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미 대선 이후 14거래일 동안 지난 22일 하루를 제외하고선 모두 달러화 대비 위안화 기준환율을 전날보다 높게(위안화 가치 절하) 제시했다. 위안화 가치는 8일 달러당 6.78위안에서 23일을 기점으로 6.9위안대로 떨어졌다.

셰야쉔 자오샹증권 애널리스트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위안화 가치 하락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인민은행인데 요즘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고 분석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Fed가 기준금리를 인상할 경우 달러화가 가파르게 강세를 보일 것에 대비해 미리 위안화 가치를 낮춰 충격파를 줄이겠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뉴욕=이심기/베이징=김동윤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