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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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씨(32)는 중견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이다. 그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거래 병원에 빵을 배달하는 일로 시작한다. ‘오늘 차가 없다’는 문자를 받는 날엔 운전기사가 된다. 의사뿐 아니다. 때론 의사 자녀의 등하교도 책임져야 한다. 어떤 날은 어린이집으로 향하기도 한다. ‘아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야 할 시간인데, 부탁 좀 하자’는 메시지를 받는 날이다. 의사 교수 교사 등 전문직들의 ‘갑질’은 직설적이다. 우월적 지위를 감추지 않는다. 당하는 ‘을’들은 꾹 참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다.

제약업체 직원을 ‘집사’처럼 부리는 의사

의사와 제약회사 간 갑을관계는 유명하다. 식사 골프 등 접대는 일도 아니다. 숫제 제약업체 직원을 ‘집사’로 여겨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부탁’하는 의사가 수두룩하다.

부산지방검찰청이 지난 6일 발표한 ‘부산 의료계 리베이트 비리’ 수사 결과에선 의사들의 ‘슈퍼 갑질’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부산 지역 한 의사는 자신이 변비에 걸리자, “동난 변비약을 찾아서 가져다 달라”고 제약업체 직원에게 요구했다. “병원에 오는 길에 인터넷 랜선, 스마트폰 케이스, 방향제 등을 사다 달라”고 요구하는 의사도 있었다. 한 제약업체 직원은 과장급 의사의 누나를 모시고 공항에 가서 출국 수속을 대행해줘야 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헌금을 요구한 의사도 적발됐다. 양산부산대병원에서 교수를 겸직한 의사는 제약사 대표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헌금을 요구했다. 제약사 대표는 교수를 대신해 4년간 7000만원가량을 헌금으로 냈다.

제약회사가 의사들에게 옴짝달싹 못하는 것은 구조 때문이다. 의약품이나 의료기기의 구매 결정권을 의사가 갖고 있다. 제약회사 태도가 맘에 들지 않으면 그 회사 의약품을 처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의료계에선 리베이트가 횡행했다. 한 제약업체 영업사원은 “리베이트를 받는 의사와 리베이트를 주는 업체를 모두 처벌하는 리베이트 쌍벌제가 2010년 도입된 이후 리베이트 대신 각종 잔심부름 요구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병원 내 ‘진료 갑질’도 문제로 지적된다. 오래 기다린 환자에게 어려운 전문용어로 아주 짧게 설명한 뒤 “나가 보세요”라고 말하는 의사가 적지 않다. 박모씨(63)는 “의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무관심하게 ‘괜찮을 거예요’라는 말만 한다”며 “돈 없고 빽 없으면 가장 서러운 곳이 병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고 말했다.

대학생에게 “네가 내 은교해라”는 교수

‘지성의 전당’ 대학에서도 갑질은 예외가 아니다. 우월적 지위를 앞세운 교수들의 갑질이 툭하면 불거진다. 학점이나 학위를 무기로 하기 때문에 ‘을’인 학생과 대학원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는 동국대 김모 교수(55)가 직위를 이용해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추행과 성희롱을 일삼아 온 것이 뒤늦게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한 졸업생과 술자리에서 강제로 입을 맞춰 성추행한 혐의가 적발됐다. 이를 계기로 피해 사례가 줄줄이 접수됐다.

김 교수는 2013년 독서 모임에서 학생에게 연예인 사진을 보여주면서 “저런 애들은 맛이 없다. 너 같은 허벅지가 좋다”라거나, “너는 내 은교(노시인과 여고생의 관계를 그린 영화 ‘은교’의 여주인공)다. 네가 내 은교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너 가슴 크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학생도 있었다.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제자에게 인분을 먹이고 야구방망이와 최루가스 등으로 수십차례 폭행한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 교수는 지난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대학원생의 봉급인 연구인건비 착취도 교수들의 대표 갑질 중 하나다. 지난 8월 21개 국책연구과제 책임자로 연구 사업을 하면서 연구원(학생)들에게 지급된 연구인건비 5억6000만원을 되돌려 받아 횡령한 동국대 교수 조모씨(48)가 구속됐다.

교수들의 갑질은 학교 밖에서도 이뤄진다.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교수 중 일부는 해당 공공기관을 봐주는 대가로 연구용역을 수주하기도 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간 공공기관 경영평가단으로 활동한 449명 중 117명(26%)이 공공기관으로부터 272건의 연구용역을 수주했다.

협박해 돈 뜯어내는 ‘사이비 기자’

기자, 환경운동가 등 직업을 악용하는 갑질 사례도 많다. 사이비 기자들은 보도 무마를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 이달 초 부정청탁을 받고 악의적인 기사를 쓴 사이비 기자들이 대거 경찰에 적발됐다. 이들은 경쟁업체의 금품을 받고 한 폐기물처리업체가 폐기물을 불법으로 매립한 것처럼 조장한 혐의(무고·공갈)로 입건됐다. 위법사항을 사진 촬영하는 등 취재 후 행정기관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해 14개 공사현장에서 870만원을 갈취한 기자가 검거되기도 했다. 충남 지역의 한 기자는 공주 농업기술센터 신축공사 현장에 찾아가 “부실공사 제보가 들어왔다”고 협박해 500만원을 갈취한 사실이 들통났다.

‘사이비 환경운동가’의 갑질 행태도 비슷하다. 경남 밀양경찰서는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먼지가 날리는 장면을 촬영해 건설회사로부터 금품을 갈취한 한 환경운동본부 지부장을 지난달 구속했다. 이들은 23개 업체로부터 52회에 걸쳐 2100여만원을 갈취했다.

황정환/도병욱/심은지/이지현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