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김영란법, 역량파괴적 환경 변화
잘나가던 1등 기업이 갑자기 경쟁력을 잃고 몰락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1등 기업조차 사라지게 할 정도로 사업 환경이 바뀌는 것을 ‘역량파괴적 환경변화’라고 한다. 이런 환경 변화는 주로 대체기술이나 대체상품의 등장, 기존 시장의 소멸, 규제 변화나 새로운 규제 시행 등에 의해 이뤄진다.

가장 많이 회자되고 또 극적인 사례는 노키아다. 사업 환경 변화에 대한 인지 실패와 안이한 대응으로 2000년대 초까지 세계 1위 휴대폰 제조사이던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애플의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휴대폰 제조업에서 경쟁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튼튼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 더 이상 휴대폰 사업의 핵심 성공요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콘텐츠,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등이 잘 어우러진 생태계 구축이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 됐다. 이런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키아는 기존 강점인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값싸고 튼튼한 휴대폰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더 이상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휴대폰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다 망해버린 주인공이 돼 버렸다. 반면 스마트폰 등장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게 경영 역량과 주변 생태계를 구축한 삼성전자는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곧 시행되는 ‘김영란법’이라는 규제 변화로 역량파괴적 환경변화가 서서히 생겨날 것으로 예상된다.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를 통한 부패 척결이라는 제정 취지를 가진 김영란법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28일부터 시행된다. 김영란법의 시행은 다각도로 한국 기업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특히 이 법으로 인해 현재까지의 경쟁우위 원천이던 핵심 역량을 잃어버리는 기업, 단체, 개인이 생겨날 것이고 반대로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는 주체도 나타날 것이다.

짧게 보면 누구나 예상하듯이 고급화로 승부해온 회원제 골프장, 고급 음식점, 호텔 식음료 매장, 한우 사육농가 등이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받고 이 중 일부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반대로 퍼블릭 골프장, 가성비 높은 맛집, 수입산 소고기 등은 환경 변화에 따른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좀 더 길게 보면 이 법은 한국 남성에게 역량파괴적 환경변화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남녀라는 성별이 김영란법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한국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의 경쟁력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사회는 지금까지 ‘관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측면이 컸다. 관계는 주로 저녁 식사나 술자리, 운동 등을 통해 형성돼 왔고, 이런 환경은 남성이 더욱 탄탄한 관계를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동한 것이 사실이다. 직장 여성 특히 기혼 직장 여성은 업무 후 육아 및 가사 등으로 저녁이나 주말에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 결과 관계 중심인 한국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네트워크 역량을 축적하는 데 남성보다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약 500만명이 적용 대상이 되는 김영란법은 서서히 저녁이나 주말에 이뤄지던 관계 형성을 줄일 것이고 그 결과 남성이 사회에서 여성에 비해 좀 더 경쟁력을 가진 주요 원천 중 하나였던 네트워크 역량을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한국사회는 실력 있는 여성이 더 성공할 수 있는 환경으로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남성에게는 역량파괴적 환경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남성도 이런 변화를 인지하고 ‘마당발’이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적 역량을 기르는 것이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좋든 싫든 한국사회와 구조적 모습을 바꿀 새로운 패러다임이 시작되고 있다.

조명현 < 고려대 교수·경영학 chom@kore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