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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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모씨(46)는 밤 12시 무렵 지하철에서 만취한 여대생 A씨(20) 옆에 앉아 무릎베개를 해줬다. 어깨를 주무르고 양팔을 만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앉아있던 승객의 신고로 법정에 서게 됐다. 항거 불능 상태인 사람을 추행한 ‘준강제추행’ 혐의였다.

2012년 9월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은 3심 모두 달랐다. 1심 판사는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한 행동이라 해도 미필적으로나마 추행의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2심은 “고의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누군가는 A씨를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었고 최씨가 은밀하게 A씨의 몸을 더듬은 게 아니라 다른 승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동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른 승객이 최씨의 행위를 수상히 여겨 신고했듯이 도덕관념에 반하는 행위”라며 유죄 취지로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다. 성폭력에 대한 경계와 해석이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 부족이 문제”

[경찰팀 리포트] 전철 만취녀 무릎베개 해줬다가…"선의라도 강제추행"
24일 경찰청에 따르면 강간과 강제추행, 성희롱 등 성폭력 발생 건수는 2010년 2만375건에서 2014년 2만9517건으로 증가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3만건을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 전반에 성폭력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신고 건수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성폭력은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성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강간미수 피해의 경우 헤어진 애인에게 당한 사례가 27.9%에 달했다. 과거 성관계하던 사이라도 현재 동의하지 않으면 성폭력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이란 분석이다.

강간의 31.3%, 강간미수의 21%, 심한 성추행의 22.5%가 직장 상사나 동료로부터 이뤄지는 등 직장 성폭력도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일상생활에서 아직 ‘이런 말이나 행동도 성폭력에 해당하는가’를 놓고 혼란을 겪는 일이 적지 않다.

공직사회에선 ‘밥줄’이 걸린 문제다. 공무원 A씨는 여성 외부 강사 B씨에게 “남자친구가 있느냐. 서해안으로 드라이브 가자”는 등의 말로 추근거린 혐의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서울행정법원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A씨가 B씨에게 대학생 때 여성 누드모델의 그림을 그리면서 모델을 만져본 적도 있다고 말한 점 등을 문제 삼으며 성적 혐오감을 느낄 만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반면 정부 부처의 C실장은 2014년 해외 출장을 갔다가 가진 술자리에서 산하단체 여직원에게 “내가 업어다 줄게, 아니면 이 앞에서 자”라고 말했다가 ‘불문경고’ 처분을 받았다. 그는 “과장은 왜 오고 서기관은 왜 왔느냐. 우리 둘만 왔으면 엄청 재미있었을 텐데. 이 사람들 때문에 아무것도 안 돼요”란 말도 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성희롱이라고 볼 정도는 아니다”며 경고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회식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친근감을 표시한 것일 뿐이라는 해석이었다.

재판부는 성희롱의 전제 요건인 ‘성적 언동’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성희롱이란 성적 언동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법원 판례는 성적 언동을 ‘남녀 간 육체적 관계나 남성 또는 여성의 신체적 특징과 관련한 육체적·언어적·시각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관계의 강제성’이 핵심

성폭력 사건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 공방이 치열하다. 대부분 은밀한 곳에서 발생해 목격자가 없다.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성이 관계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는 경우엔 특히 그렇다. 최근 연예인 박유천 씨의 ‘화장실 성폭행’ 의혹도 마찬가지다. 쟁점은 ‘관계의 강제성’이다. 상당수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따라 판결이 갈린다.

지난해 3월 D씨(여·29)는 한 모텔에서 알몸 상태로 잠에서 깨 화들짝 놀랐다. 성관계 흔적이 있었지만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전날 이성을 소개해주는 소셜데이팅 앱(응용프로그램)을 통해 E씨(33)를 만나 술을 마신 뒤 ‘필름’이 끊겼다. E씨는 “합의하에 관계를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D씨는 “만나러 나갈 때부터 성관계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E씨를 항거 불가능 상태인 사람을 강간한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법원은 D씨의 말에 특별한 모순이 없다고 봤다. 결국 E씨는 실형 2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달리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지난달 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윤모씨(49)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라고 주장한 정모씨(여·45)는 윤씨 집에서 술을 먹는데 윤씨가 갑자기 자신을 밀쳐 넘어뜨린 뒤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는 등 협박해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정씨가 경찰에 신고하는 것보다 먼저 윤씨에게 전화를 건 점 등에 주목해 정씨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법무법인 혜안의 최원기 변호사는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이뤄진 관계였지만 이후 대화가 잘 안돼 법적 다툼이 생기는 일이 있다”며 “진술의 신빙성과 폐쇄회로TV(CCTV)로 확인되는 두 사람 간 관계의 성격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 성폭력의 종류

강간: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상대의 의사와 반하게(합의 없이) 한 성관계.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타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신체접촉을 한 것. 술 취한 사람 등 항거불능 상태인 사람을 추행하면 ‘준강제추행’에 해당.

성희롱: 성적 언동 등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