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에서 신격호 총괄회장(93)의 지위는 절대적이다. 롯데백화점 임원들에게 ‘실적을 잘 내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신격호) 회장님이 주신 ‘롯데’라는 브랜드 덕분”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정도다. 신 총괄회장은 90세가 넘은 고령에도 백화점 점포를 둘러보고 미진한 점을 지적할 만큼 경영을 꼼꼼히 챙겼다. 하지만 두 아들이 60대가 될 때까지 경영에 관여하며 후계구도를 명확히 정리하지 않은 것이 2세 간 경영권 분쟁의 가장 큰 배경이 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위기의 롯데] 폭격 딛고 일어선 '93세 현역' 신격호…'자식 싸움'에 명예 추락
○83엔으로 80조원대 그룹 일궈

신 총괄회장은 만 20세가 되던 1942년 단돈 83엔을 갖고 일본으로 갔다.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밤에는 와세다대 응용화학부(야간)에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처음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44년 선반용 기름 공장을 세우면서다. 하지만 이 공장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해보지 못했다.

5만엔의 빚만 남았지만 그는 다시 사업자금을 마련해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세웠다. 이곳에서 비누, 크림 등을 만들어 팔아 1년 반 만에 빚을 다 갚고 재기에 성공했다. 1948년엔 제과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후인 1967년 롯데제과를 세우면서다. 처음엔 중화학공업과 철강산업 진출을 시도했으나 좌절되자 일본에서 성공한 경험이 있는 제과사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1979년 서울 소공동에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를 잇달아 열면서 관광·유통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후 롯데는 성장을 거듭해 8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연 매출 80조원대의 재계 5위 그룹이 됐다.

○불명확한 후계구도 분쟁 씨앗

신 총괄회장은 2011년 당시 신동빈 롯데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고, 본인은 총괄회장에 오른 뒤에도 회사 일을 꼼꼼히 챙겼다. 각 계열사 대표이사에게 월 1~2회 정기보고를 받았고 백화점, 마트 등을 방문하는 ‘현장경영’도 계속했다.

점포에 들르면 매출 등 기본적인 경영 현황은 물론 경쟁 점포 매출, 주변 교통 여건까지 꼬치꼬치 캐물어 점장들의 혼을 빼놓곤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잘해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점포 직원들은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그는 7개 주요 계열사의 등기임원을 맡고 있다.

그러나 신 총괄회장이 ‘친정’을 계속하면서 롯데그룹의 후계구도는 불투명한 채로 남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 부회장이 일본 사업을 맡고, 차남 신동빈 회장이 한국 사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지분구도는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장남과 차남이 한국과 일본 롯데 주요 계열사의 지분을 동시에 보유하게 해 분쟁의 여지를 남겼다. 롯데 한 고위 임원은 “총괄회장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음으로써 두 아들을 경쟁시키는 한편 본인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형제 싸움에 본인 명예도 실추 위기

재계에서는 형제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지분구조가 분쟁의 불씨가 됐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누구라도 아버지를 등에 업어야 경영권 승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 총괄회장의 건강마저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롯데그룹의 후계구도는 더욱 안갯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신 총괄회장은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등 판단이 흐릿할 때가 적지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1세 경영인이 최대한 오래 권한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면서도 “하지만 그럴수록 후계구도의 불확실성은 높아지고 자녀들의 분쟁에 휘말려 한평생 쌓아올린 명예까지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