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새누리당의 사회주의적 전환
“대한민국은 내부로부터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붕괴를 막는 것은 시대적 과제다.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경제 체제를 개혁하자. 복지도, 자유시장경제도 한계에 봉착했다. 사회적 경제가 새로운 대안이다. 사회적 경제란 협력과 연대를 기본 원리로 하는 것이다. 국가 위원회를 만들고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사회적 경제 책임을 부과하자. 그리고 전국과 지역에 걸쳐 그물망 같은 조직을 만들어나가자.”

유승민 의원이 67명 동료 의원과 함께 제출한 사회적 경제기본법의 취지다. 김무성 이완구 정의화 등의 이름도 눈에 띈다. 국가의 기본 원리를 자유와 창의에서 협동과 연대로 전환하자는 역사적 선언문의 격조다. 지향하는 가치가 헌법 개폐적 수준이다. 그러나 법 개정을 통해 국가 이념의 뼈대를 수정할 수는 없다. 국회의 수권 범위를 넘어선다. 위헌이다.

자유와 창의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를 기본 가치로 내세운다면 헌법 119조 1항이 선언하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조차 위반이다. 국가의 보완적 개입이 아니라 체제를 고칠 것을 요구하는 법이다. 제안자들은 시장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보완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법은 일단 만들어지면 기득권을 형성한다. 이 기득권은 전국적 조직으로 확산되고 선거 때마다 강화된다. 민주주의가 타락해가는 과정과 기득권이 제도화되는 과정은 어느 때고 정확하게 일치한다.

민주주의는 종종 국가 체제의 전복을 시도한다. 바이마르 헌법 속에서 총통제를 만들어낸 히틀러도 그런 경우다. 유신 헌법도 90%가 넘는 전 국민적인 지지 속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는 이미 너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어서 혁명이 없이는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다. 포퓰리즘이 아니라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법률들이 너무 많다. ‘구성원의 적극적인 자기 혁신과 자발적인 참여’를 규정한 것은 실로 사회주의적 강령이다. 사회주의형 인간에 대한 선언이요 선포다. ‘자율을 명령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국가의 명령에 의한 자기 혁신은 천리마 운동이 되고 만다. 독재의 부활이요,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이념시대로의 회귀다.

이 법안에 따르면 기재부 장관은 사회적 경제 5개년 기본계획을 세워야 한다. 이 기본 계획에 따라 해당 관서장은 1년 단위 시행계획을 세운다. 대통령 직속으로 사회적 경제위원회를 두고 민간 위원장 아래에 기재부 장관을 부위원장으로 둔다. 국가 조직인 사회적경제원을 두고 지역 통합지원센터를 둔다. 발전기금도 창설한다. 기금의 염출 혹은 갹출이 진행될 것이다. 국가는 사회적 경제조직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5%까지 구매해야 한다. 아마 이 수치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사회적 경제의 날도 지정해야 한다. 법은 이런 명령으로 채워져 있다.

국회가 너무 쉽게 법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19대 국회 들어 이미 18대 전체를 넘어서는 법안이 제출되고 있을 정도다. 아름다운 법안들은 아침이 오면 부끄러워 찢어버리게 되는 연애편지들처럼 태어난다. 설익은 법안들은 젊은이들의 값싼 열정으로 태어나지만 뒤늦은 후회로 폐기의 수순을 밟는다. 유승민 의원은 이런 경우를 “얼라들이 멀 안다꼬!”라며 비꼰 적이 있다. 그 말을 돌려드려야 할 것 같다. 이런 법들은 국가 경제를 점차 보조금과 지원금, 세제혜택에 찌들게 만든다. 지금도 대부분 사회적 기업들은 기존의 일자리를 대체할 뿐이다. 일자리는 기업의 창조적 혁신에서만 만들어진다. 명분이 아름다우면 현실도 그리될 것으로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언제나 일을 그르친다.

이들은 실은 시장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모든 사회주의적 전망은 구성의 오류에 불과하다. 조합이 아니라 주식회사야말로 수많은 사람이 협동하고 연대하도록 만드는 기제라는 사실, 개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정의롭고 공정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이들은 알지 못한다. 인민주의적 향수요 천동설적 시도들에 불과하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