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친척 질문공세 피하고픈 싱글족, 시월드 부엌데기 두려운 주부족…故鄕은 苦鄕? 설 당직 박 터지네
민족의 명절 설 연휴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다. 월·화요일 이틀 휴가를 내고 미리 지난 14일(토)부터 22일(일)까지 9일간 장기 휴가를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설 연휴도 마다하고 사무실을 지키는 김과장 이대리들도 있다. 각자 사연은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짬밥에 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근무하는 경우도 있지만 손을 들고 근무를 자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자청 타청으로 연휴에 근무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어 봤다.

◆“연휴 당직도 사회생활 요령이죠”

전자 대기업에서 일하는 강모 대리는 지난해 추석에 이어 올 설에도 연휴 시작 일과 마지막 날에 근무를 자청했다. 가족들의 질문이 부담스러워서다. 강 대리는 30대 중반의 미혼이다. 가족들은 ‘언제 결혼하냐’에서부터 ‘회사는 다닐 만하냐’ ‘연봉은 많이 받냐’ 등 10년째 똑같은 질문을 계속한다.

“명절 스트레스를 받느니 일하는 게 낫습니다. 휴일 근무를 하면 그 다음주 평일에 대체휴일을 쓸 수 있으니 휴일 근무가 나쁜 것만도 아니죠.”

중견 출판사에 근무하는 임모 과장(여)은 이번 설 연휴 동안 수·금·일요일에 징검다리로 출근할 예정이다. 소규모 출판사에서 최근 이직한 그는 기존 여직원들의 텃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근무를 자청했다. 그동안 여직원 저녁식사 모임이나 업무 중간 수다에는 제대로 끼지도 못했고, 임 과장을 뺀 메신저 대화방이 있다는 것도 우연히 알게 됐다. 임 과장은 설 연휴 당직 근무표가 나오자마자 동료들에게 “대신 서줄 테니 나중에 밥이나 한 번 사”라고 제안했다. “‘이게 웬 떡!’ 하는 표정이 딱 드러나는 거예요. 말투나 태도도 누그러진 것 같고요. 이런 게 사회생활 아니겠어요?”

◆연휴 근무 경쟁 붙는 사연

직원 100여명의 중견 인터넷기업 A사는 서버 관리 등 업무 특성상 연휴에도 한 명 이상은 근무를 해야 한다. 이달 초 당직 모집 공고가 나자 하루도 안 돼 5명 자리가 모두 마감됐다. 두 명은 40대 미혼 남성, 두 명은 시댁이 먼 결혼 4~5년차 여직원들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미혼의 20대 후반 입사 2년차 여직원이었다. 모두 드러내고 자청 사유를 말하진 않지만 사내에서는 “그럴 만하다”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는 분위기다. 결혼 성화를 피하고 싶은 마음, 고된 연휴 노동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 어느 정도 공감된다는 것. 그러나 입사 2년차 20대 후반 후배는 이유가 밝혀지지 않아 의혹을 사고 있다. “남자친구랑 헤어진 것 아니냐”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회계법인 세금 파트에서 일하는 정모 대리는 결혼 4년차 주부다. 밀려드는 프로젝트 탓에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하지만 명절이 되면 과중한 업무가 오히려 반갑다. ‘시월드(시댁을 뜻하는 신조어)’에 가서 부엌데기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 첫해에 보낸 추석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 부산 시월드에 가서 일가 친척 20여명의 시중을 들어야 했다. 차례 음식 준비하랴, 어르신들 끼니 챙기랴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 후 두 해 연속 대형 프로젝트를 맡게 돼 악몽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시댁의 불호령에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정 대리는 “올 추석에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큰 프로젝트를 따내리라”고 다짐했다.

◆“그래, 나 ‘설’ 사는 미혼녀다!”

교육업체에 근무하는 30대 초반의 미혼녀인 박 대리는 서울 토박이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까지 수도권에 살아 연휴에 지방에 갈 일이 없다. 회사 당직표를 짜는 선배도 이런 상황을 이미 파악했는지 명절마다 박 대리를 자꾸 당직에 넣는다. 지난 1월1일에도 당직을 섰는데 이번 설 연휴에도 당직표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걸 보자 순간 울컥해 당직 짜는 선배에게 “우리 집도 설 쇠거든요!”라고 외쳤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은 “할머니댁이 인천이라며? 오전만 다녀오면 되겠네. 너 남자친구도 없잖아?”라는 2단 콤보. “선배가 농담조로 말해서 참았지, 안 그랬으면 정말 뒤집어엎을 뻔했어요. 추석 전까지는 남자친구라도 하나 만들어놔야겠어요.”

명품 패션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일하는 최 차장은 설에도 편안히 쉬기는커녕 연휴기간 내내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어야 할 판이다. 프랑스 사람인 지사장이 설 연휴 개념(?)이 없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아서다. ‘글로벌 워커홀릭’으로 소문난 지사장은 평소에도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 온갖 질문을 한다. 최 차장이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도착한 뒤에는 10통 가까운 메일이 도착하는 것이 예사일 정도. “남들은 외국계 회사라고 하면 휴일은 칼같이 쉴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지사장은 예외예요. 휴일이라 해도 답이 늦으면 ‘스마트폰 체크하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은 것 아니냐’며 정색을 하니까요.”

◆“가족들 얼굴만 봐도 어디예요ㅠㅠ”

대형 건설사 홍모 대리는 2년째 설을 직장 동료들과 보내고 있다. 근무지가 중동의 한 건설 현장이어서다. 올해 설 연휴도 중동에선 평일이다. 현지 달력에 맞춰 근무하는 홍 대리와 직장 동료들은 올해 설 연휴에도 꼼짝없이 출근해야 한다. 국내 근무보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고 복귀 후 부서 선택이나 승진에 이점이 있어 받아들인 해외 근무지만, 명절 때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은 올해가 더 참기 어렵다. “설 당일엔 한국 직원들과 아침에 간이 차례를 함께 지내고 윷놀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두 돌 지난 아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고향까지 혼자 가야 하는 아내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하네요.”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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