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서 논문으로 끝날 아이디어, 기업서 협업 통해 상용화 주도할 것"
“노벨상보다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술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서울대 화학과 테뉴어(정년 보장) 교수직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LG화학에 둥지를 튼 이진규 수석연구위원(전무·사진)은 지난 13일 출근길에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대전 유성구 LG화학 기술연구원으로 출근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나노(10억분의 1) 단위 소재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조명에 쓰이는 나노 소재에 관한 연구로 향후 노벨상 수상 가능성도 거론되는 석학(碩學)이다.

“순수하게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상대성이론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염두에 두고 연구하진 않았을 겁니다. 반면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디슨 같은 학자들도 있죠. 저는 에디슨에 좀 더 가까운 타입입니다. 사물의 원리를 파헤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연구를 실용화하는 것에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 부분에선 대학보다는 아무래도 기업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죠.

이 수석연구위원은 대학과 기업의 실용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네트워크에 있다고 진단했다. “물질이 나노 크기로 작아지면 일반 형태에선 나타나기 어려운 특이한 성질을 띠게 됩니다. 일반 플라스틱에 나노 소재를 섞으면 매우 단단해지거나 색깔·자성을 더하는 등 전혀 새로운 성질을 띨 수 있죠. 문제는 저는 나노 물질은 좀 알지만 두 물질을 고르게 섞어주는 방법은 잘 모른다는 거예요. 대학에선 혼합·분산 전문가를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 해도 그 전문가가 나노 물질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나노 과학이 세상에 알려진 후 30여년간 대학 실험실에선 수많은 ‘가능성’을 논문으로 찍어냈지만 변변한 실용 제품이 아직 없다는 건 그만큼 네트워크 구축이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기업 연구소는 상용화를 위한 네트워크가 이미 갖춰져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LG화학에 와보니 플라스틱만 다루는 팀도 있고 혼합·분산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조직도 있어요. 전문가 네트워크가 이미 조성돼 있는 거지요.”

이 수석연구위원은 2013년 안식년(교수들에게 7년마다 주는 연구년)을 LG화학에서 보냈다. 2012년 서울대-LG화학 공동 세미나 자리에서 만난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장(사장)이 “연구 실용화에 관심 있는 교수를 찾고 있다”고 하자 “내가 바로 그런 교수”라고 손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 실험실에서 구상한 아이디어들을 1년간 열심히 실험했습니다. 다양한 프로젝트팀과 많은 의견을 나눴죠. 신참 연구원들이 낸 아이디어까지 무시되지 않고 전 구성원이 도움을 주려고 나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은 여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LG화학 기술연구원에는 이 수석연구위원이 속한 중앙연구소(기초·미래기술)와 석유화학, 배터리, 소재 등 LG화학 각 사업부 연구소가 밀집해 있다. 각 분야 전문 연구인력 2200여명이 프로젝트별로 팀을 짜 연구하고 있다. “아직까진 팀별 업무를 파악하고 제가 함께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는 단계입니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OLED 조명 실용화 프로젝트를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연세대 화학과 출신으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OLED 조명에 관한 연구는 MIT 박사후 과정에서 낸 성과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죠. 미국에선 실험실에서도 기업가 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흥미 있는 논문이 나와서 검증하는 실험을 한다면 한국 대학에선 기초부터 공부합니다. 실패를 줄일 수 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해당 논문 외에 새로운 결과를 얻기도 어렵죠. 반면 미국에선 곧바로 실험에 들어갑니다. 실패하면 원인을 찾아서 보완하고요. 속도도 빠르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선 일단 전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섯 번 실험 가운데 네 번은 성공, 한 번은 실패라고 합시다. 한국에선 실패한 한 번의 원인을 찾아서 완벽한 논문을 쓰려고 하는 게 보통이죠. 저도 그랬고요. 미국에선 네 번 성공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새로운 연구로 한 발이라도 앞서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 학계에도 완벽한 논문을 쓰는 것보다 새로운 전진을 더 가치 있게 보는 분위기가 자리잡히길 바랍니다.”

대전=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