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래동은 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공간이다. 독일 영국 등 산업화 역사가 오래된 국가들은 산업단지 리모델링 후 기업과 문화공간이 공존하는 곳으로 탈바꿈한 곳들이 종종 있다. 독일 루르공업지대에 속하는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와 영국 맨체스터 등지다.

하지만 낡은 공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공존하는 곳은 흔치 않다. 대학 시절 연극 활동을 했던 이현아 문래예술공장 총괄매니저는 “문래동과 비슷한 해외 사례를 찾아봤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금요일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홍대앞’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공간인 것처럼 문래동 역시 한국 특유의 ‘공장-예술 공존공간’이라는 얘기다.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다원 문화공간 ‘정다방프로젝트’, 문래예술공장 1층 로비, 낡은 공장이 있는 금속가공 메카 문래동(이 지역 골목 안에 전시장들이 있다), 대안 예술공간 ‘이포’(가운데).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오른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다원 문화공간 ‘정다방프로젝트’, 문래예술공장 1층 로비, 낡은 공장이 있는 금속가공 메카 문래동(이 지역 골목 안에 전시장들이 있다), 대안 예술공간 ‘이포’(가운데). 그래픽=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다양한 예술인들 활동

문래동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장르는 다양하다. 회화 설치미술 음악 연극 행위예술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있다.

가장 많은 예술공간이 자리잡은 곳은 문래동 사거리에서 옛 남부지방법원 앞까지다. 옛 남부지법 맞은편 건물 지하엔 정다방이 있었다. 소송을 벌이는 사람들이 ‘최후의 담판’을 하던 곳이다.

남부지법이 목동으로 옮겨간 뒤 정다방은 폐쇄됐지만 그 자리엔 대신 ‘정다방프로젝트’라는 다원문화공간이 들어섰다. 간판도 그대로 쓴다. 갤러리이면서 전시 공연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곳이다.

기자가 이곳을 찾은 지난 14일에는 조지프 하월 시빌리(미국), 차이후이잉(대만), 이지영(한국) 작가의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주방을 개조한 미팅룸에선 20대 젊은이들이 퍼포먼스 준비를 위한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박무림 정다방프로젝트 대표는 “이곳에선 ‘다방에서 만나요’ ‘작당모의’ 같은 실험적인 전시나 공연이 이뤄진다”며 “새로운 시도를 중시한다”고 말했다.

골목길에 있는 ‘대안 예술공간 이포’는 이곳 대표인 박지원 씨 고향 여주 이포에서 따온 이름이다. 사진과 영상 중심의 창작실이자 전시공간이다. 옛날 문래동 사진과 지금의 공장 모습, 비디오아트 등이 전시 상영되고 있다. 40여명의 예술인이 참가하는 이 기획전 이름은 ‘내용증명’이다.

‘예술공간 세이’에서는 각종 전시와 워크숍뿐 아니라 외국인 예술가들과의 국제 교류도 이뤄지고 있다. 공연제작 창작집단 ‘극단몸꼴’과 예술체험교육을 연구하는 ‘몸꼴 상상력훈련소’ 등도 있다. 이곳의 관계자는 “예술의 사회적 치유 기능에 관심을 갖고 예술치료를 주목적으로 삼은 전문예술단체”라고 소개했다. 극단 몸꼴은 비언어신체극을 연습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문(moon)’에서는 밴드 공연이 주로 이뤄진다.

게스트하우스도 성업 중

[문래동의 변신] 공장과 예술, 기묘한 동거…문래동은 '상상력 훈련소'
문래동에 문화공간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예술인들이 모이는 곳도 형성됐다. 따끈한 어묵과 정종이 있는 ‘정겨운 집’, 수다를 떨 수 있는 카페인 ‘모두의 수다’, 제철 식재료로 주인장 말랑 씨가 직접 만드는 집밥과 간식을 맛볼 수 있는 ‘쉼표말랑’ 등이다. 목조건물인 쉼표말랑은 이 동네 목수인 최문정 씨가 설계한 것이다.

특이한 술집도 여럿 있다. ‘불탄집 아곤’은 러시아풍 술집이다. 러시아 문화를 좋아하는 주인이 실내장식을 러시아풍으로 꾸몄다. 보드카 등 러시아 술을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공장지대 한복판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독특한 정취를 맛보려는 젊은이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성업 중이다. ‘어반아트’는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곳이다. 이 게스트하우스에는 바비큐 시설이 있고 덤으로 문래동 투어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소공인들과 협업 나서기도

예술가와 기업인 간 협업도 이뤄지고 있다. ‘환경프로젝트’다. 박동주 대영기업 사장은 지난해 유지연 설치미술가, 윤영필 씨(금속 엔지니어)와 공동으로 표지판 작업을 벌였다. 이정표와 안내판 등을 금속으로 가공해 설치했다.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이뤄졌다. 1989년부터 문래동에서 선반과 밀링 가공 사업을 해온 박 사장은 “문래동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 많아 화장실도 대부분 재래식”이라며 “이를 점차 개선하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곽의택 문래소공인특화지원센터장은 “문화와 산업 공존은 대세이고 그래야 젊은이들도 일하러 온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이곳의 예술가 중에는 문래동 소공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디자이너들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산업디자이너들도 몰려와서 기업인과 힘을 모은다면 산업과 예술의 협업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 왜 문래동인가

문래동에서 활동하는 기업인과 예술인들.
문래동에서 활동하는 기업인과 예술인들.
문래동에 예술인들이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임차료가 저렴하고 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이다. 예술인들이 선호하는 홍대앞은 공연장, 상점, 출판사 등이 몰려 임차료가 치솟았다. 홍대앞은 작은 공간 하나를 얻으려 해도 월 임차료가 100만원이 훌쩍 넘기 일쑤다. 하지만 문래동은 건물 2층이나 지하의 경우 방 하나에 월 20만~30만원이면 된다. 배고픈 예술가로선 솔깃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문래동으로 몰려들었다.

문래동은 홍대앞에서 전철로 10분 거리다. 게다가 인근에 신도림역과 영등포역이 있다.

쇠를 소재로 설치미술을 하는 사람들은 소재를 구하기가 쉽다. 그러다보니 반경 200m 안에 갤러리 공연장 전시장 연습장 등 수십 곳의 문화공간이 몰려 있다.

글=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