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은 모순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 아닐까. 모순의 양립은 정체성의 혼돈을 의미한다. 확실성을 요체로 하는 법 규범에서는 절대적인 금기다. 선하면서 애매한 법은 분명하면서 악한 법보다 사회에 더 많은 혼란과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작년 이맘때 필자는 한 포럼에서 그때 공정거래위원회가 세종시로 이전함에 따라 생길 수도 있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있는 전속관할 문제를 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현재 위 법률 제55조는 공정위 처분에 대한 불복의 소는 ‘공정위 소재지를 관할하는 서울고등법원을 전속관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공정위 소재지는 세종시 다솜 3로 95이고, 각급 법원의 설치와 관할 구역에 관한 법률은 대전고등법원으로 하여금 세종시를 관할하도록 하고 있다.
위 법문의 내용 중 ‘공정위 소재지’에 방점을 두면 그 관할은 대전고등법원이 돼야 하고, 마지막 목적어에 주목하면 서울고등법원이 전속관할권을 가지는데, 도대체 이 모순된 ‘대전서울고등법원’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 5월에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면서도 이 조항은 그대로 뒀다. 더 놀라운 건 작년 한 해 공정거래법 위반 사건의 관할을 둘러싸고 그 어떤 논란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사건을 접수하는 서울고등법원은 어떤 묘수로 이 실정법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고 있을까. 가능한 해석은 ‘공정위 소재지’의 개념을 확장해 서울지방사무소의 소재지로 보는 것이겠지만, 공정위의 지방사무소는 서울 말고도 대구, 대전, 부산, 광주에도 있다. 이 중 서울지방사무소만을 공정위 소재지로 본다는 건 형평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법해석 권한의 남용이다. 물론 이것이 법원의 잘못은 아니다. 어느 곳에서건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하는 사법부 입장에서는 대전고법이건, 서울고법이건 사건을 접수해 심리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원인은 주무부처인 공정위의 안이함과 입법부의 게으름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새해엔 정의인가 아닌가, 보수인가 진보인가의 거대 담론에 빠지는 대신 법조문 하나라도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풍토가 입법과 행정 전반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이번주 글은 아직도 낮은 대우를 받고 있어 가슴 아픈 인류의 절반인 여성에게 헌사한다.아들 셋, 딸 둘 오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릴 적 받은 교육 속에 스며든 성별 편향을 인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들들은 딸들보다 더욱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지원받았다. 아들은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지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관습적 사고에서였다. 반면, 네 자매 중 막내인 아내는 아무런 제한 없이 전문직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누릴 수 있었다.우리 부부의 세 딸은 국제 교육을 통해 양성평등 문제에 대한 명철하고 참여적 시각을 갖췄기에 가부장주의적 오류에 빠질 위험에서 나를 확실히 구해줬다! 나 자신을 ‘개조’하는 데 딸들의 반응과 의견이 큰 도움이 됐지만, 그럼에도 긴 세월 노력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부터 주입된 규범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내가 개선돼 온 과정이 직업적 책무와도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성평등 문제는 프랑스 외교 활동 중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사회에 첫발을 디딘 1999년의 프랑스 외교부는 극히 남성적인, 때론 여성 비하적 시각을 가진 세계였다. 여성 직원에게는 최소한의 상징적 역할이 주어졌고, 특히 고위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연례 공관장회의 기념 단체사진을 보면 정장에 넥타이 차림을 한 남자 일색이다.오늘날 많은 것이 바뀌었고,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프랑스 여성 공관장 비율은 2012년 14%에서 2024년 34%로 증가했다. 무엇보다 2024년도 신규 임용 대사 중 52%가 여성이었다. 프랑스의 젊은 여
중국의 굴기는 더 이상 단순한 양적 성장의 서사가 아니다. 지구촌은 중국의 압도적인 기술 부상과 함께 성장 둔화, 부동산 침체, 청년 실업 등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 중국 굴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의 ‘상승 곡선’에 머물러서는 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오늘의 중국은 고속 성장에서 체제 전환기로 들어선 다층적 변화의 변곡점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중국 굴기의 중심에는 공산당의 전면적 영도가 자리하고 있다. ‘당·정·군·민·학 동서남북중,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는 원칙은 통치의 근간이며 시진핑 시대 들어 더욱 공고해졌다. 인민해방군 역시 당의 군대다. 약 1억 명의 당원 조직이 국가·사회·시장 전반을 통할한다. 종엄치당(從嚴治黨)의 통치 방식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과거 빠른 성장으로 내부 정당성을 구축하던 방식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성장 둔화와 사회적 긴장 요인이 확대되자, 시진핑 당 지도부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구호와 함께 안보·민족주의·기술자립을 새로운 통치 논리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 중심에 ‘동방은 떠오르고 서방은 가라앉는다’는 기세론이 자리하고 있다.중국 관료 체제의 오랜 경쟁력으로 평가되는 능력주의 역시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선현임능제(選賢任能制), 민주추천제 등은 고속 성장을 떠받친 제도적 기반이었다. 최근 정치적 충성의 비중이 커지면서 관료사회의 역동성과 실험 정신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앙집권 강화로 지방의 정책 자율성이 줄어드는 현상은 중국 성장의 핵심 메커니즘이던 ‘지방 경쟁 모델&r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밤 조용히 공개한 국가안보전략(NSS)이 던진 충격파가 크다.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어서라기보다 미국 정부의 공식 문서라기엔 깜짝 놀랄 만큼 솔직하게 작성됐기 때문이다.미국은 이 문서에서 ‘힘에 부친다’는 말을 다양하게 쏟아내고 있다. “미국이 아틀라스처럼 세계 질서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전 행정부를 향한 비판은 때론 과도해 보이지만, 기존의 NSS 문서들이 거의 모든 문제를 망라하던 것에 대해 “모든 것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한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덩치 커진 中과 공존 모색문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중국이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서술은 명백하게 의도적으로 이중적이다. 중국을 경쟁 상대, 적국으로 인식하는 대목에서는 ‘비(非)서구권 경쟁국’ ‘타국’ ‘잠재적 적대세력’ 등으로 변주해 가면서 중국을 지칭했다.반면 경제 교류를 하면서 잘해 보자는 메시지를 담은 대목에서는 중국을 ‘중국’이라고 썼다.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현재 30조달러 규모의 미국 경제를 40조달러까지 키울 수 있다”는 문장은 거의 짝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7년 트럼프 1기 정부의 NSS가 중국이 “미국의 가치와 이익에 반하는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세력”이라고 공격적으로 규정한 것과 대조적이다.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때 중국과 한판 결전을 벌여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할 때였고,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대중 관세를 부과했고 조 바이든 정부에서도 유지됐지만, 중국에 대한 타격은 미미했다.4년 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