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하버마스가 웃을 불통론
“원칙을 일컬어 불통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랑스런 불통”이라고 말한 이정현 수석은 뭇매를 맞았다. 애매한 정치성향을 드러낸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최근 ‘성은이 망극한’이라는 눈길을 끄는 제목으로 청와대의 불통을 비아냥거렸다. 맞선 자리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색을 좋아하세요?” 남자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똥색이요.” 이런 대화라면 결과도 짐작할 수 있다. 대선 불복의 언어가 1년을 끌었다면 소통론은 비열한 무기일 뿐이다.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는 선동구호 역시 대화를 차단한다. 소통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이나 정언명제처럼 들리지만 사용처와 컨텍스트에 따라 의미는 복잡하다.

사장의 퍼스낼리티 때문에 회사 내 소통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장(소통)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솔직한 태도다. 사장과 사원의 소통 가능성은 회사 규모에 따라서도 다르다. 삼성전자 같은 거대 회사라면 더욱 그렇다. 우선 정보량부터 차이가 크다. 그 ‘지식 격차’만큼 소통은 멀어진다. 업무 범위의 격차도 소통을 제한한다. 대기업 말단 사원의 소통범위는 기껏해야 부장 아니면 이사대우다. 사장의 소통 하한선도 비슷하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소통의 형식을 흉내낸 선전공세다. 이론물리학자가 초등생과 초끈이론을 토론할 수는 없다.

독일의 하버마스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통과 공론장 이론의 전문가다. ‘universal pragmatics’를 ‘보편화용론’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무래도 작위적이다. 어떻든 계몽과 진보를 부정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신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라야 ‘생활세계의 언어와 기술합리적 언어’라는 대립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도 소통의 ‘보편적 조건’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똥색과 황금색의 차이를 당사자들 모두가 구분해 수용하는 공통의 인식조건을 말한다. 그게 공론장이다. 그래서 보편이라는 말이 붙는다. 미감(美感)은 주관적이지만 똥색은 똥색, 황금색은 황금색이라는 객관적 일치가 있다.

황홀한 낙조를 보면서 “죽이는군요!”라고 말할 때 “누가 누구를 죽여!”라는 식의 반응이라면 구제불능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상이 이런 수준이다. 소통이론이 민주주의의 법적 형식적 외형까지 대체할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포스트모던적 정신 분열에 불과하다. 소통은 문학 텍스트로 성립할지는 모르지만 체제나 시스템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법률이나 제도 같은 체제언어를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치명적 약점이다. 빈껍데기로 변해버린 체제언어의 예를 들자면 노조권력, 철밥통, 공기업 등의 언어군이 대표적이다. 좌익이야말로 일상의 정치언어를 썩은 체제언어로 만드는 도사들이다. 활발한 생활정치가 체제상 민주주의로 화석화하는 것을 걱정했던 하버마스가 직면했던 것은 대중독재의 나치즘이었다. 광우병 괴담처럼 민영화 괴담을 지어내거나, 철밥통 노조의 파당적 이익을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문제의 ‘성은이 망극’ 칼럼에서 송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한 대화장면을 소개했다. 일단 용비어천가로 분위기를 잡은 다음 본론을 펴려는 순간 대통령이 가져간 마이크가 돌아오지 않더라는 푸념이다. 송 교수는 그날 밤 포장마차의 한 잔 술로 아쉬움을 달랬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송 교수’들이 청와대 주변에는 항상 넘쳐난다. 인지 부조화다.

말이 꼬였던 이유를 송 교수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부드러운 직언(直言)’이라는 얄팍한 계산 때문이다. 직언은 직언으로 끝내야 한다. 더구나 소통의 부재를 비판하면서 철도노조, 대자보, 종북 문제를 슬쩍 걸고 넘어지는 것은 고약하다. 숨은 의도를 넘어 철학까지 의심받는다. 최소 언어인 법률언어부터 부정한다면 과연 무엇으로 소통과 공존의 준거틀을 세울 것인가. 함부로 불통을 말하지 말라.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